성인(聖人)이 성인이 된 까닭은 ‘숙(熟)’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숙(熟) 자를 깊이 음미해 보면 그 의미가 무궁하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聖人之所以爲聖人, 不過一熟字耳. 성인지소이위성인 불과일숙자이
深味熟字, 其意味無窮, 豈不好乎! 심미숙자 기의미무궁 기불호호
-
임성주
(任聖周, 1711~1788), 『녹문집(鹿門集)』 권17 「한천어록(寒泉語錄)」
해설
1730년, 녹문(鹿門) 임성주는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를 뵈었습니다. 젊은 녹문은 노성한 도암에게 그간 학문하며 의문스러웠던 점을 여쭈었습니다. 「한천어록」은 그때 도암과 녹문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문답식으로 정리해 놓은 글입니다.
녹문이 그 유명한 『논어』의 맨 첫 장,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 대해 묻자 도암은 자세하게 답을 해 주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이 성인이 된 까닭은 ‘숙(熟 익숙함)’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숙(熟)’ 자를 깊이 음미해보면 그 의미가 무궁하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알면 제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성리학의 기본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배우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배워서 알게 된 것을 때때로 익혀서[時習]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도암은 여기에서 ‘숙(熟)’ 한 글자를 강조합니다. 배운 것이 진정 내 것이 되려면 완전히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성인(聖人)들도 사실 익숙해질 때까지 자신이 배운 것을 익힌 사람들이었지, 처음부터 우리와 바탕이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도암은 녹문에게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고, 익숙해지도록 해서 종국에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는 공부를 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현대인과 공부(工夫)의 목적도 다르거니와 공부 과정 역시 다릅니다. 지식의 홍수라고 할 만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느 한 가지만 진득하게 탐구할 여유가 없습니다. 더 많이 보려 하고 더 많이 얻으려 해서 조금이라도 진척이 보이면 어서 빨리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옛사람들이 특히 경계했던 것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진득하게 노력하여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렇듯 옛사람들의 방식은 ‘더 빨리 더 많이’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반성(反省)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선덕 9년(1434) 7월에 전하께서 지중추원사 이천(李蕆)에게 말씀하셨다.
“경이 예전에 감독하여 만든 활자로 인쇄한 책들은 참으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다만 글자 모양이 너무 작아 읽기 불편한 점이 있으니 큰 글자로 된 책으로 자본(字本)을 삼아 다시 주조하는 것이 더 좋겠다.”
라고 하시며 그에게 활자 주조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 집현전 직전 김빈(金鑌),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 이세형(李世衡), 의정부 사인 정척(鄭陟), 봉상시 주부 이순지(李純之), 훈련관 참군 이의장(李義長) 등에게 실무를 주관하게 하셨다. 그리고 경연(經筵)을 위해 보관된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騭)』·『논어』 등을 꺼내어 자본으로 삼게 하고, 부족한 글자는 진양대군 유(瑈)에게 직접 쓰게 하셨다. 공역은 그달 12일에 시작하여 2개월 만에 20여만 자를 주조하고 9월 9일에 처음으로 인쇄에 들어가니, 하루에 인쇄한 양이 40여 장이나 되었다. 또한, 활자 모양이나 인쇄 방식이 이전의 활자에 비해 훨씬 더 반듯하고 갑절이나 더 수월해졌다.
1434년(세종16) 9월 9일에 갑인자의 주조를 마치고 그 내력을 기록한 김빈의 글이다. 이러한 내용의 글을 주자발(鑄字跋) 또는 주자사실(鑄字事實)이라고 한다. 조선조 활자본 가운데에는 책의 말미에 본문과는 별개로 인쇄에 사용된 해당 활자를 설명한 주자발이 수록된 사례가 종종 보인다. 이 주자발은 활자의 주조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 작성하는 것으로 해당 활자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 또한 조선의 금속활자가 대부분 왕명에 의해 주조되는 것인 만큼 조선왕조실록에 활자 주조에 대한 전후의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자료를 근거로 조선의 대표적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 경위를 알아보자.
갑인자의 주조는 세종의 나빠진 시력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세종은 젊은 시절 고기 없이는 식사를 못할 정도로 육식을 즐긴 까닭에 몸이 매우 비만했다. 게다가 30세 이후로는 소갈병(당뇨병)에 걸려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로 심했다. 결국, 당뇨 합병증으로 세종은 심한 안질(眼疾)을 앓게 된다.
왕자들이 먼저 나서 세종에게 기존의 활자인 경자자(庚子字)보다 모양이 큰 활자를 새로 만들자고 건의했다. 인쇄된 책의 첫 번째 독자는 다름 아닌 세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당시 원로대신인 판중추원사 허조(許稠)까지 합세하여 자신과 같은 늙은 신하들이 노안에 보기 편하도록 큰 활자로 책을 인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여진족에 대한 북벌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병기 보충을 위해 구리의 수요가 많았고 그 일을 맡을 기술자들도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서적의 간행 역시 꼭 필요한 일이어서 경자자 주조 때 감독을 맡은 경험이 있는 이천에게 다시 책임을 맡기고,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이의장 등에게 실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활자의 바탕이 되는 자본(字本)은 중국 서법의 최고 1인자인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로 간행한 『효순사실』과 『위선음즐』 그리고 『논어』에서 뽑는 것으로 정했다. 여기에서 빠진 글자는 진양대군, 즉 수양대군이 직접 써서 보충하게 했다. 활자 주조의 공역은 1434년 7월 12일에 시작하여 2개월도 지나지 않아 20여만 개의 활자가 만들어졌다. 세종은 이렇게 완성된 갑인자를 가지고 먼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인쇄하도록 정척에게 명하였는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 이는 하루에 20여 장을 찍은 경자자의 두 배나 되는 인쇄량이다. 활자 모양도 이전보다 규격화되어 조판과 인쇄를 하기에 훨씬 수월해졌다.
▶ 왼쪽: 1434년에 갑인자로 인쇄한『대학연의』 (미국 예일대학교 도서관 소장) 오른쪽: 1436년에 갑인자로 인쇄한 『근사록집해』(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1077-2호)
당시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악조건 속에서 20여만 자의 활자를 주조하는 데에 걸린 기간이 2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고 모양도 한층 정교해진 것은 그만큼 활자의 주조 기술이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감독을 맡은 이천을 비롯하여 장영실, 이순지 등 실무를 주관한 이들이 모두 세종대 과학기술을 주도한 조선 최고의 과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갑인자에 글꼴을 제공한 『효순사실』과 『위선음즐』은 어떤 책일까? 『효순사실』은 책 이름 그대로 효성이 지극한 중국의 역대 인물 207명에 대한 사적을 모아 10권으로 편집하여 1420년에 완성한 책이며, 『위선음즐』은 역대의 자선가 165명에 대한 전기자료를 모아 역시 10권으로 편집한 책으로 1418년에 완성되었다.
두 문헌은 세종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가 책의 서문을 썼을 뿐 아니라 각 인물의 행적을 직접 시(詩)로 지어 수록할 만큼 편찬에 깊이 관여했다. 따라서 간행이 되자마자 중국 내의 친왕(親王)들과 고위 관료 및 국자감을 비롯한 각급 학교에 배포되었고 조선에도 대량 유입되었다.
그중에서도 『위선음즐』은 특히 많이 들어왔다. 1419년 6월에 영락제는 성절사 이지숭(李之崇)을 통해 600권을 보내 주었고, 2개월 뒤인 8월에는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을 통해 1,000권을 보내왔다. 또 그해 12월에는 사은사 이비(李裶)를 통해 22상자를 보내 주기도 하는 등 1종의 서적을 실로 엄청나게 보내 주었다. 갑인자의 주조가 시작되기 직전인 1434년 5월 25일에는 명나라 황제가 보낸 『위선음즐』 441질을 각 관청과 신하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효순사실』은 1434년 세종이 설순(偰循)에게 명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할 때 많은 영향을 준 책으로, 『효순사실』에 수록된 영락제의 시가 『삼강행실도』에서 그대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이들 두 문헌은 중국의 황제가 직접 편찬하여 간행한 것인 만큼 외형상으로도 이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서적이었다. 따라서 갑인자가 이를 자본으로 삼았다는 것은 당대 최신의 품격 있는 글꼴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0년 후 중종(中宗)은 이 갑인자로 인쇄한 책을 보고 종이 품질뿐만 아니라 인쇄 상태도 매우 정교하여 근고(近古)의 서책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면서 그 뒤로는 점점 수준이 떨어졌다고 한탄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갑인자는 선조, 광해군, 현종, 정조 등 후대 왕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개주(改鑄)되면서 조선말까지 서적의 인쇄 출판에 가장 크게 기여하게 된다.
2002년에 나온 밀리언셀러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켄 블랜차드가 쓴 이 책은, 그 책장을 넘겨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제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녀노소 누구나 ‘칭찬’하면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대한민국에 칭찬 열풍을 몰고 온 이 책 덕분에 칭찬에 인색하던 우리 사회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나의 긍정적인 태도와 관심과 칭찬이 상대를 바꿀 수 있다는 이 메시지에는 사람의 실제 행동을 잘 이끌어내는 밝고 따뜻한 힘이 있으니, 상당히 훌륭한 대인관계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요즘 매스컴이나 SNS상에 넘치는 과도한 칭찬들을 보다 보면, 이 칭찬 열풍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서 범람하는 오버액션이나 지나친 칭찬을 접할 때면 공감은커녕 괴리감이 들면서 언짢아지곤 한다. 실상과 동떨어진 칭찬은 오히려 아부에 가깝다. 칭찬하는 사람은 할 때는 비굴하고 돌아서면 민망하며, 받는 사람 역시 그것이 과분함을 알기에 받을 때는 흐뭇하나 돌아서면 찜찜하다. 그러니 피차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설령 아부하려는 의도 없이 그냥 서로 간에 듣기 좋자고 하는 칭찬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런 칭찬을 주고받다 보면 정작 꼭해야 하는 비판을 꺼리게 되어 직시해야 할 문제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실정에 맞는 칭찬을 강조한 위 편지의 글귀는 경청할 만하다. 조긍섭은 조선 말기의 학자이고, 면우(俛宇)는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호이다. 면우는 당시 영남의 큰 선비로, 유생들이 연서(連書)한 독립호소문을 파리강화회의에 발송했다가 투옥되어 병사한 독립투사이기도 하다. 자신보다 27살 아래인 조긍섭의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에 대한 질의와 논변에 대해, 면우가 “고명하고 탁월하다”, “앞으로 가르침을 구하도록 하겠다”라고 칭찬하자, 그 말씀이 지나치다며 이렇게 정색을 하고 질정에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사제 간이나 친구 사이에, 실상과 상관없이 서로 추켜세우고 겸손을 부리는 말과 모습을 일삼다 보니 경박하고 가식적인 풍조[澆僞之風]가 만연하게 되었다고 꼬집었다.
칭찬은 인간관계의 윤활유이지만, 이 또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인색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게, 그리고 실정에 맞게 칭찬하는 적정선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치(緻)이며, 어머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첨(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김씨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