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회가 모도의 첫 번째 여행에 이어 두 번째 여행을 하기 위해

고운샘의 세세한 여행계획의 수고로

2022년 5월 22일 일요일 5호선 공덕역 1번 출구에서 만나

목적지인 제천 의림지를 향해 출발하였어요

2시간 30분을 소요하여 목적지에 도착하니 점심 때가 되어

호반식당에서 곤드레밥을 맛있게 먹었구요~~^^

 

우린 먼저 의림지에 대한 상식을 얻고서

둘러보기로 하고 의림지 역사박물관으로 go~ go~~

 

 

제천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삼대 저수지 중 하나라고 합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의림지로 나오니 

의림지와 함께 오랜 시간 굴곡진 소나무들과 어우러진 숲은

자연의 아름다움 자체로 감탄사가 절로절로 나왔습니다~~^0^

 

 

잠시 벤치에 앉아 휴식시간을 활용하여 추억사진을 만들었어요~~^^

잠깐만~~고운샘은 내 머리 위에 토끼귀 만들어 놓고 시침 뚝~~ㅋㅋㅋㅋㅋ

 

 

고운샘이 잠시 고전무용을 했던  어릴적 추억을 되살려 멋진 춤사위를 보여주고요~~

 

 

의림지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청풍호로 이동을 했답니다

먼저 청풍호 근처의 숙소로 들어가 가방과 짐을 옮기고

청풍호 둘레 숲산책을 위해 숙소를 나와 산책로를 걸었어요

울창한 나무와 우거진 숲속에서 

한층 기분이 충만하여 저절로 동요가락이 나왔답니다~~^^

 

을밀대 해바라기 슬피 우는 밤......~~

오잉~~~~?????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의 동요가 요렇게~~~ㅎㅎㅎㅎㅎ

개사에 뛰어나신 주인공은 누구시게요~!?

 

 

산책을 마치고 숙소앞에서 해넘이를 보기 위해 기다리면서

또 하나의 추억을요~~~

두분샘의 동심의 놀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드디어 해넘이가~~!!!!!^^

 

 

해넘이를 즐기고 숙소로 들어와 한벗샘의 반찬들과 고운샘이 준비해 오신

삼겹살과 된장찌게로 저녁을 준비하여 

행복한 저녁만찬을 즐겼어요

아참~~ 와인은 고운샘꺼

 

 

저녁식사를 마치고 셋이서 많은 덕담을 나누고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금방 꿈나라 여행을 떠났어요~~

잘 자고 일어나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청풍문화재단지 여행을 나섰습니다

 

새롭다는 것보다 내 어릴적 정겨운 풍경을 새삼 들여다보는 느낌이 좋았어요

장독대 옆의 마가렛꽃과 마당의 화단에 핀 모란꽃도~~

 

 

비석치기 놀이하는 우리들의 동심과 진심이 느껴집니다!!!~~ㅎㅎ

 

 

잠시 의자에 앉아 청풍호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에서 무념무상의 평화로움이 그대로 느껴지시지요~~!?

 

 

망월루를 오르면서 주변의 기이한 나무들을 사진에 담았어요~~

연리지 소나무

 

멋진 몸매 S라인 벚나무

 

드디어 청풍호와 겹겹의 산등성마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망월루에 올랐어요~~!!!!!

 

 

망월루에 오른 기념사진도 남기구요~~ㅋㅋ

 

 

즐겁고 행복한 1박 2일의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오는 도중 

대보명가에서 "제천약초밥상"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어요

 

짧은 아쉬움은 있지만

우리는 아까시꽃이 만발한 계절에 또하나의

행복을 지었답니다~~

 

무사히 마친 우리들의 두 번째 여행을 자축하면서~~

두분샘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모든 계획과 준비를 맡고

운전까지~~ㅎㅎ

고운샘 고맙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명구
2022년 3월 23일 (수)
2021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작  
   
완전한 혼자라는 신화
   
"나는 그대가 언젠가 펼쳐질 것을 안다. 굽어 있던 것이 펼쳐지는 것은 이치의 형세이다."
 吾知子之伸有日. 旣屈則伸, 理之勢也.
오지자지시유일 기굴즉신 이지세야

- 서경덕(徐敬德, 1489~1546),『화담선생문집(花潭先生文集)』권2 「김사신자사(金士伸字詞)」

   
해설
   ‘화담 서경덕은 별다른 스승 없이 자연과 홀로 마주하여 씨름하며 학문을 깨우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 天 글자를 벽에 붙이고서 면벽 수행을 하듯 깊이 파고들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한 그가 사망한 뒤 30년가량이 지나 조정에서 추증 문제가 거론되었다.

 

   선조는 서경덕의 저서를 살펴보니 기수(氣數)에 관해 논한 바는 많으나 수신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했고 공부에 의심스러운 바가 많다며 우의정 추증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때 박순, 허엽 등 서경덕 아래 문인들이 항변했지만 이에도 선조는 끝내 의심스럽다며 주저했다. 그때 율곡은 서경덕의 공부는 배우는 자가 본받을 바가 아니고 성현의 뜻과는 거리가 있지만 깊이 생각하여 먼 곳까지 도달해 자득한 묘함이 많고 문자언어의 학문이 아니라고 말해주어 결국 우의정으로 추증되는 것이 허락된다.

    어떤 이가 소위 관직과 거리를 두며 은일했다고 하면 외부를 향한 창을 굳게 닫은 채 독야청청, 홀로 안분지족하며 지냈겠거니 치부하게 된다. 그러나 율곡이 화담을 알아준 것처럼 화담 또한 그의 벗 김한걸이 재능을 품고서도 오랫동안 굽히고 있었음을 알아주고 그가 곧 선현의 공적을 좇아 뜻을 펼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등 창을 활짝 열고 다른 이를 알아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할 것을 근심하라.’ 막상 내가 인정받지 못한 채 남을 알아주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이미 몇 번이나 마음에 아로새긴 이 경구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시대가 각박해지고 일상이 조급해질수록 사회, 특히나 문화 경향은 개인 내부를 향하게 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봐 안달이 나고 두려워져 남을 아는 것 또한 덩달아 꺼려지곤 한다. 내가 서경덕을 스승 하나 없이 홀로 고고했던 문인으로 남겨두고 싶어 한 것도 한편으로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론 위안 삼을 고고한 천재가 필요해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경덕은 자신에겐 스승이 없어 공부하는 데 무척 고생했고 뒷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의지해 공부하면 힘들지 않을 거라고 늘 말했다고 하니 완전한 홀로라는 신화는 사실 몽상에 가까웠던 걸까. 이에 앞서 무엇보다도, 굽은 것인 펴지기 마련이라는 말이 선사하는 뭉클한 위안이 나의 힘듦에 가려 잊고 지내는 친구와 가족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혼자서만 뜻밖에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버린 것처럼.

 

글쓴이홍부일
프리랜서 문학번역가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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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감상
2020년 11월 11일 (수)
이백열세 번째 이야기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칠월 칠석이라 가을 날씨 이른데
오동잎 소리에 먼저 깜짝 놀라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강남의 나그네
여관에서 잠 못 이루고 빗소리를 듣네

七月七夕秋氣早칠월칠석추기조
梧桐葉上最先驚오동엽상최선경
欲歸未歸江南客욕귀미귀강남객
旅館無眠聽雨聲려관무면청우성
 
- 정호 (鄭澔, 1648~1736), 『장암집(丈巖集)』권1, 「칠석(七夕)」

   
해설


   정호가 함경도 유배 중에 지은 시다. 음력 칠월 칠석이면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이곳은 북쪽 지방이라 그런지 서늘하다.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면 가을이 왔다는 걸 천하가 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라고 했던가. 오동잎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을을 실감한다. 고향 생각이 간절하지만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유배객 신세다. 마음이 착잡하니 잠이 올 리 없다.

   정호는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의 현손이다. 그는 1710년 함경도 갑산에 유배되었다. 당론을 일삼는다는 죄목이었다. 한때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그는 죄인의 신분으로 다시 함경도 땅을 밟았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유배생활은 한두 해 만에 끝날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갑산은 변방의 오지다. 이미 노쇠한 몸은 극변의 모진 날씨를 견뎌내기 어렵다. 이대로 이곳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다. 운이 좋아 일찍 이곳을 벗어난들 무엇하겠는가. 이미 정년퇴직할 나이다. 내 인생은 여기까지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읽던 주자(朱子)의 책을 꺼내어 일과를 정해 매일 읽었다. 때로 마음에 맞는 구절을 만나면 고달픈 신세를 잊기 충분했다. 두어 사람과 함께 읽으며 토론하니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가 새로웠다.

   노년에 유배지에서 다시 책을 손에 든 정호의 모습은 그의 선조 정철을 닮았다. 정철은 56세 때 평안도 강계에 위리안치되었다.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나무를 둘러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캄캄한 집안에서 정철은 『대학』을 읽었다. 소주(小註)까지 전부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무껍질을 벗겨 『대학』을 옮겨쓰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은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정호는 끝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선조 정철을 떠올리며 책을 집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학잠(老學箴)>을 지었다.

   사광(師廣)이 말했다. 

 “어려서 공부하는 것은 해가 처음 떠오르는 것과 같고, 젊어서 공부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과 같으며, 늙어서 공부하는 것은 밤에 촛불을 켜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리고 젊을 때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늙어서 배운다고 늦었다고 하지 말라. 밤에 촛불을 켜면 아무리 어두운 곳도 밝아지니, 계속 촛불을 켜면 햇빛을 대신할 수 있다. 촛불과 햇빛은 다르지만 밝기는 마찬가지이다. 밝기는 마찬가지이고 그 맛은 더욱 진실하다. 이 때문에 위 무공(衛武公)은 아흔 살에 시를 지었으니,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여 나의 스승이다.  

師曠有言, 幼而學之, 如日初昇. 壯而學之, 如日中天. 老而學之, 如夜秉燭. 幼壯之學, 無以尙已. 旣老且學, 毋曰晚矣. 以燭照夜, 無暗不明. 燭之不已, 可以繼暘. 暘燭雖殊, 其明則均. 其明則均, 其味愈眞. 所以衛武, 九十作詩. 老而冞篤, 其惟我師.

   늙어서 공부하기는 젊어서 공부하기보다 어렵다. 눈도 침침하고 기억력도 떨어지니 공부가 잘 될 리 없다. 하지만 노년의 공부를 방해하는 건 무엇보다 자포자기다. 이 나이에 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정호는 갑산에 유배된 지 1년 만에 강원도 평창으로 유배지를 옮기고, 반년 뒤에는 완전히 풀려났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다시 환로에 오른 정호는 영의정까지 지내고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배에서 풀려나고도 무려 24년이나 더 살았던 것이다. 갑산에 유배되었을 때 이제 내 인생은 끝이라고 포기했다면 말년의 화려한 성취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는 말은 치열하게 살라는 뜻일테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는 말은 나이를 핑계로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대개는 반대다. 영원히 살 것처럼 게으름을 피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공부를 쉽게 포기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후회만 쌓일 뿐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운다면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주요 저·역서
『한국산문선』, 민음사, 2017(공역)
『일일공부』, 민음사, 2014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 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 등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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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취종필(大醉縱筆)  (0) 2017.03.16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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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2019년 9월 4일 (수)
삼백쉰두 번째 이야기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견고하다 하지 마라. 갈다 보면 뚫리는 법이니.



勿謂堅 磨則穿
물위견 마즉천


-

이가환(李家煥, 1742-1801),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하(下) 「윤배유연명(尹配有硏銘)」
   
해설
   윗글은 조선 후기 문인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이 윤배유(尹配有)의 벼루에 쓴 명문(銘文)의 일부이다. 옛사람은 벼루・연적・거울・지팡이 등 생활에 쓰이는 물건에 글을 새겼는데, 대부분 자신을 경계하는 뜻이나 물건의 연혁을 담은 내용이었다. 이글은 끊임없이 갈다보면 먹이 벼루를 뚫는 것처럼 아무리 어려운 학업이라도 성실한 자세로 끊임없이 연마하다보면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커다란 성취를 이룩한 사례는 역사에서 종종 찾을 수 있다. 초서체(草書體)로 일가를 이룬 중국 한나라의 서예가 장지(張芝)는 연못가에서 돌에 글씨를 썼다가 물로 씻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연못물이 모두 새까맣게 변할 때까지 글씨를 연마하였으며,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조선의 서화가이자 학자인 김정희(金正喜)는 칠십 평생 10개의 벼루를 뚫었고 천 여 자루의 붓을 닳게 할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사회는 성실한 노력으로 인한 성취보다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한탄과 분노만이 가득하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넘어서기가 힘든 사회적 차원의 장벽이 도처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근로 계약 형태에 따른 불평등의 장벽․성별이나 인종 등 각종 차별의 장벽・자본의 규모에 따른 불공정 경쟁의 장벽 등, 여러 사회적 장벽들이 너무나 공고하게 버티고 서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장벽은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순환 구조를 막아 건전한 사회발전을 저해한다. 우리 사회도 이러한 점을 인지하여 법적・사회적으로 장벽 허물기를 시도하고 있다. 불평등・불공정・차별을 해소하자며 국민들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차별을 금지하는 법도 일부 제정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장벽이 기득권의 카르텔과 공동체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탓에 변화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실한 노력으로 인한 성취를 저해하는 사회적 장벽이 허물어져야 비로소 개인들이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하다 하지 말고, 노력하여 허물고 또 허물어 보자.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다.
글쓴이이승철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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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2019년 8월 14일(수)
오백열일곱 번째 이야기
백이 숙제는 고사리를 먹지 않았다
   
번역문

    미(薇)는 야생 완두콩이다. 좌수(坐水)라고도 한다. 도랑 옆에서 자라는 덩굴 식물이기 때문이다. 대소채(大巢菜)라고도 하는데, 소소채(小巢菜 새완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소소채는 교요(翹搖)라고도 하며, 합환목(合歡木 자귀나무)과 비슷하지만 몹시 작다. 지금의 ‘자괴밥’이다. 대소채는 완두와 비슷하다. 잎은 길쭉하고 둥글며 줄기는 조금 모가 났고, 꽃은 자주색이며 열매는 가늘다. 『본초강목』에서는 열매가 없다고 했는데 그 그림을 보면 열매가 작으니, 열매가 없다고 한 것은 열매가 많은 완두콩과 비교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 줄기와 잎은 채소국을 만들 수 있고, 열매도 곡식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이와 숙제가 캐어 먹은 것이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는 육기(陸璣)에 근거하여 풀이하였는데, 이것이 옳다. 주자(朱子)는 호씨(胡氏)를 따라서 미궐(微蕨)이라고 의심하였는데, 미궐은 지금의 자궐(紫蕨 고사리)이다. 『사기(史記)』를 말하는 자는 마침내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먹었다고 여겼다. 

  자서(字書)에 “미(薇)는 궐(蕨)과 비슷한데 가시가 있고 맛이 쓰다. 백이와 숙제가 먹고서 3년 동안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고사리는 연한 줄기 식물이니 어떻게 오래 먹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상(商)나라가 멸망한 시기는 몹시 추운 날씨였다. 우리나라 풍속에 사신이 늘상 마른 고사리를 싸 가지고 가다가 청성묘(淸聖廟) 아래를 지나면 삶아서 반찬으로 삼으니, 더욱 우스운 일이다.

원문

薇卽豌豆之野生者也. 亦名坐水, 以其蔓生溝渠傍也. 亦名大巢菜, 以其似小巢菜也. 小巢, 一名翹搖, 形肖合歡木而至小, 卽今之괴밥. 大巢, 略肖豌豆, 葉橢圓, 莖微稜, 花紫, 實細. 本草無實, 而其圖亦作短莢, 知其謂無實者, 比之豌豆之多實故爾. 其莖葉可作蔬羹, 實亦充穀食, 故夷齊采而食之. 孔疏據陸璣解之, 是矣. 朱子因胡氏, 疑其爲微蕨, 微蕨卽今之紫蕨也. 說史記者, 遂謂夷齊食蕨鼈, 字書則云, 薇似蕨, 有芒味苦. 夷齊食之, 三年顔色不變, 夫蕨屬柔莖, 安可耐久服, 況亡商在大寒之候乎? 東俗, 貢使每齎乾蕨, 及過淸聖廟下, 煮以下飯, 尤爲笑資矣.

-유희

(柳僖, 1773~1837), 『시물명고(詩物名考)』

   
해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자 천하가 주나라를 받들었다. 상나라 정벌에 반대하던 백이와 숙제는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薇]를 캐어 먹다가 굶어죽었다. 『사기』 「백이열전」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로 인해 백이와 숙제, 그리고 고사리는 절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 박물학자 유희는 『사기』에 기록된 ‘미(薇)’의 실체를 파고들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 공영달의 『모시정의』, 육기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 주희의 『시집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미’는 고사리가 아니라 들완두라는 결론을 내렸다. 방증도 제시했다. 산에 숨어 사는데 먹을 것이 없으면 풀보다는 열매 종류부터 찾아먹는 게 순서다. 백이 숙제가 은거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멀쩡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풀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은나라가 멸망한 때는 한겨울이니, 산속에 고사리 따위는 없었다는 게 유희의 주장이다.

 

   백이 숙제가 먹은 풀이 고사리가 아니라는 유희의 주장은 신선하다. 대부분의 조선 문인들은 ‘미(薇)’를 고사리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주자 탓이다. 주자는 『시집전』에서 “미는 궐(蕨 고사리)과 비슷한데 조금 크고 가시가 있으며 맛이 쓰다.[薇似蕨而差大, 有芒而味苦]”라고 풀이했다. 주자의 풀이는 호인(胡寅, 1098~1156)의 해석을 따른 것인데, 『시집전』은 『시경』 이해의 필수 텍스트였으니 ‘미’가 고사리로 굳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믿음에 바탕하여 조선 사신들은 중국 영평(永平)에 있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 청성묘를 지날 때면 고사리로 국을 끓여먹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여러 연행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한번은 고사리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를 맞은 음식 담당 하인이 백이 숙제를 원망하며 말했다. “죽으려면 그냥 죽을 것이지 하필 고사리를 캐 먹어서 내가 매를 맞게 만드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고증적 학문 태도가 유행하면서 굳어진 해석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薇)’가 고사리가 아니라는 주장은 유희만의 견해가 아니다. 이미 1613년 간행된 『시경언해』에서는 면마과에 속하는 ‘회초미’로 풀이했고, 『재물보』와 『광재물보』에서는 유희와 마찬가지로 들완두로 풀이했다. 각종 농서(農書)와 의서(醫書)를 보아도 조선 문인들이 ‘미(薇)=고사리’라는 오류를 무작정 답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을 바보 취급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문헌에 등장하는 모든 ‘미(薇)’를 들완두로 간주할 수도 없다. 물명(物名)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사람마다 달리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물명이 서로 다른 사물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이러한 현실이 ‘물명고(物名攷)’라는 저술을 낳았다. 한자 물명을 한글로 풀이한 물명고는 문헌에 나타나는 물명과 실제 사물과의 간격을 해소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볼 때는 더욱 주의해야 한다. 역관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중국에 가면서 후박(厚朴)이라는 약재를 십여 바리나 싣고 갔다. 책문(柵門)을 통과하자마자 중국 상인을 만나 흥정하니 값을 몇 배로 쳐주기로 했다. 하지만 조수삼이 가져온 후박을 본 중국 상인은 말을 바꾸었다. 

 “이건 무슨 나무 껍질인가? 후박이 아니다.” 

 조수삼은 굴하지 않고 북경까지 후박을 가져갔다. 북경 상인들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물건이길래 여기까지 가져왔소?” 

조수삼이 후박이라고 하자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버렸다. 누군가가 진짜 후박을 가져왔다. 

“이것이 후박이오.”

 

 

   중국의 후박은 자작나무 껍질처럼 얇고 매운 맛과 향이 나는 것이 계피에 가까웠다. 조선의 후박과는 판이했다. 조수삼은 힘들여 북경까지 가져간 후박을 전부 내다버렸다. 원가에 운송비까지 합치면 손해가 막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국과 조선의 물명이 서로 달라 빚어진 에피소드다.

 

   고사리를 삶아먹던 들완두를 삶아먹던 상관없지만, 약재의 명칭을 잘못 풀이하여 엉뚱한 약재를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다. 의학서에 실려 있는 수많은 약재의 실체를 일일이 검토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고문헌에 실려 있는 이른바 ‘전통 지식’을 이용하려면 물명이 지칭하는 사물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 국립생물자원관 등이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고문헌을 전문적으로 연구, 번역하는 이들은 관심이 부족해 보인다. 고전의 현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갈 길이 멀다.

장유승

 

 

글쓴이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주요 저·역서
  • 『현고기』, 수원화성박물관, 2016
  • 『일일공부』, 민음사, 2014
  •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 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 등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2019년 1월 11일 금요일~~

성동 수업을 마치고 제주로 퇴근~~ 룰루랄라~~~

아들과 둘이서 한라산 등반을 위해서죠!!

 

오후 8시쯤 제주에 도착하여 공항을 빠져 나오자마자 가랑비가 시작이다~ㅠㅠ

서울에서 이미 비 예보를 보고 왔지만

도착 즉시 내리는 비는 어쩐지 징조가 좋지 않았어요

 

숙소로 들어가지 전에 저녁은 "기억나는집"의 해물탕으로~~

 

 

 

 

 

다음 날 아침 6시에 기상~

등반 장비를 갖추고 숙소를 나서 성판악으로 가는 중에 가랑비가 또 시작이구요 

성판악 주차장은 이미 만차상태이고

주차장 진입 양쪽 도로가에 1km이상 주차된 차량이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우리도 도로가에 주차를 하고 등반장비를 챙겨 성판악 휴게소로 들어가니

흡사 시골 장터에 붐미는 인파를 보는 듯~~

등산객으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어요

부랴부랴~ 스패츠와 비옷을 착용하고 김밥 두 줄로 아침을 하고~~!!!

9시쯤 산을 오르는 줄에 합류하였답니다

 

 

 

"세계자연유산 한라산국립공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출발은 자신있게!!!~ㅋㅋㅋ

그러나

비옷을 입고

흡사 바위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돌길과~

쌓인 눈 위에 비가 내려 눈죽탕이 된 길을

걸어 오르기는 그리 쉽지는 않았어요~ㅠㅠ

얼마 오르지 않아 비옷 덕분에 배출되지 않은 땀으로 온몸이 젖고~

눈죽탕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하여 신은 아이젠과~

등에 멘 배낭의 무게가 산을 오르기에 만만치 않았어요~

 

 

 

 

 

 

한라산 백록담까지의 등반은 정해진 시간대에 통과하지 못하면 하산하여야 하니

오르는 동안 그 정해진 시간이 심적 부담으로 이렇게 크게 미칠 줄 몰랐어요~!!!

무조건 통과 외에는 아무 겨를 없이 오르고 또 오르고~~

1시간 30분만에 속밭 대피소에 도착~~~

속밭 대피소에서 재정비를 하고 진달래밭 대피소를 향해 출발했지요

진달래밭 대피소를 12시에 통과해야만 백록담을 오를 수 있답니다

속밭 대피소 이후의 길은 일렬로 걸을 정도로 좁은 오솔길의 계속이었어요

오직 비에 젖은 눈을 밟는 소리를 들으며

앞 등산객의 등산화 뒷꿈치만 보고 걷고 오르고~~

주변의 풍광을 느낄 여유는 사치일 뿐

tv에서 보는 행군의 모습이랄까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 그저 육신만이 대열에 이끌려 올랐어요

차츰차츰 육신의 에너지가 고갈되기 시작하고

정신력도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이 상태로 올라가도 12시까지 진달래밭 대피소 통과는 무리라

도중 포기를 해야할 지~

아님 무조건 올라가 시간이 넘으면 그때 그만 둘 지를 결정해야 했어요

못 올라가고와 포기는 완전 다르니 한참을 고민하다가

포기로 마음을 정하고 잠깐 앉아 쉬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어요~~!!!

삶을 돌아보면 안 하고와 못하고만 있었지

포기한 적은 생각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포기하는 순간 마음과 육신의 통증이 없어짐을 느꼈고

포기도 삶을 사는 방법 중 한가지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어요~~!!!

 

 

비는 그치고~

 속밭 대피소에 도착하여 잠깐 쉬면서 점심으로 준비해 간

컵라면과 컵누룽지, 김밥으로 먹는 행복을 만끽하구용~ㅎㅎㅎ

 

 

 

 

포기하고 얻은 마음의 여유를 기념사진으로 남겼답니당~~ㅋㅋㅋ

 

 

 

 

삶의 과정에서

성공의 화려함에 가려진 어둠의 이면과

실패에 얻어진 교훈의 이면~~

모든 일의 결과는 양면이 존재하죠~ㅋㅋ

한라산 등반의 포기로 우리는 시간을 얻었으니

제주 여행에서 먹은 음식 중 생각나는 음식을 먹으러 가기로 하고

성판악을 출발~~~

먼저 "해월정"의 보말칼국수를 먹기 위해 가는 중에

용눈이 오름(龍臥岳)을 들렀어요

용눈이 오름의 형세는 용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라는 데서 '용논이(龍遊)'

또는 마치 용이 누워 있는 형태라는 데서 '용눈이 오름(龍臥岳)'이라고 하네요

와~~~ 전경이 대단대단~!!!

바람도 대단대단~~!!!

태어나 처음 맞아 본 바람바람~~!!!  

 

 

 

 

용눈이 오름을 출발하여 "해월정"으로~~go, go

보말칼국수와 죽볶음으로 가끔 생각 남을 채우구요

 

 

 

 

 

해월정 앞에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은 흐린 날씨 탓에 조망이 좋지 않았지만

바다의 먼 끝을 바라보고 있으니 맘이 훤하게 틔였답니당~~ㅎㅎㅎ

 

 

 

 

숙소로 들어가 잠깐 쉬고 우리는 다음 먹거리를 위하여~~go, go

바로 "칠돈가"의 흑돼지고기랍니당~~ㅋㅋㅋ

고기를 먹을 때마다 생각나게 하는 칠돈가의 맛~ 와우~~!!!  

1호점에서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 2호점으로 가라하네요

우리는 불만 없이 무조건 2호점으로~~

근데 여기도 마찬가지......

기다렸다가 드디어 자리에 앉았어요

연탄불 위의 석쇠에 고기가 얻어지고~~

써빙해 주시는 분의 고기 다루는 손놀림을 바라보는 기다림의 행복~~ 

대멸치를 발효시켜 만든 멜젓 소스와 볶은 굵은 소금~

나는 개인적으로 소금을 찍어 먹는 맛이 고기의 맛을 극대화 시키더라구요~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내일 돌아갈 채비를 하고

서울로 올라갈 시간 전에 마지막 먹거리를 위해 취침~~ㅋㅋㅋ

일요일 아침 6시 기상~~~

아침 먹거리는 "중문해녀의집" 전복죽입니당~~~ㅎㅎㅎ

8시부터 영업시작이라 부랴부랴~~go, go

늦지 않게 도착하여

전복죽 냠냠~~

그래~ 바로 이 맛이양~

 

 

 

 

해녀의 집 앞에 펼쳐진 바다는 아직도 흐린 날씨 탓에 조망이 그닥잖다

하지만 자연의 작품은 아름다웠답니다~~ㅎㅎ

 

 

 

 

 

 

한라산 등반이 목적인 이번 여행은

오히려 그리운 맛을 찾아 다닌 먹방 투어가 되었네요~~ㅋㅋ

 여행 내내 아들이 써준 맘이 고마웠고~

그리고 며느리도 함께 정말 고맙답니당~~ 

제주를 떠날 때까지 흐린 날씨가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날아오니 그제야 맑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네요~

성공의 기억이 최상이지만 실패의 추억도 소중함을 크게 깨달은 여행이었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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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2018년 8월 29일 (수)
  2017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작  
   
마음의 갈래를 잡으라
   
두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두 갈래로 내지 말고,
세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세 갈래로 내지 말며,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라.

 

 

弗貳以二  弗參以三  惟心惟一  萬變是監
불이이이  불삼이삼  유심유일  만변시감


-

이황

(李滉, 1501-1570), 『퇴계집(退溪集)』 권7「성학십도(聖學十圖)」 경재잠(敬齋箴)

   
해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퇴계가 선조(宣祖)에게 올린 학문의 요체를 나타낸 도식이다. 그는 선조가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다. 그 중 아홉 번째 「경재잠(敬齋箴)」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는 주희(朱熹)가 말한 “두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두 갈래로 내지 말고, 세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세 갈래로 내지 말며,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라”를 말하며, 이것이 바로 경(敬)의 자세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에 집중하여 한 갈래의 마음으로 모든 일에 임하는 것은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모든 일을 진정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경(敬)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구절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主一無適)’, ‘항상 또랑또랑하게 깨어 있게 한다(常惺惺)’,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엄숙하게 한다(整齊嚴肅)’이다. 즉, 경의 자세는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다른 데 여러 갈래로 흩어져지지 않고, 항상 깨어 있으며, 단정한 몸가짐과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진정성을 나타낸다. 퇴계는 경을 그의 사상적 핵심으로 삼고, 매 순간 경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을 유지하는(持敬) 태도는 매순간 흐트러질 수 있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잡아준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패륜적, 엽기적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진정성이 매몰되고 피폐해진 윤리의식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진정한 자아를 모색하는 것은 건강한 개인과 건강한 사회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퇴계의 성학십도는 바로 이 진정성을 중심으로 한다. 두 가지 일, 세 가지 일에 마음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고는 정작 내 마음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지는 않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퇴계선생이 주는 교훈이다.

 

글쓴이박현정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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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2018년 1월 10일 (수)
오백열두 번째 이야기
*2018년 1월부터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가 달라집니다. 매주 월요일 선보였던 ‘고전산문’이 서울신문과 공동기획하는 연중연재물인 ‘고전의 향연-옛 선비 블로그:문집’으로 진행될 예정이오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행복의 비결, 자족(自足)
   
번역문

   홀로 있을 때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오래된 책을 펼쳐 보며 한가롭게 드러누우면 그뿐이다. 잡생각이 나면 밖으로 나가 산길을 걸으면 그뿐이고 손님이 오면 술을 내와 시를 읊으면 그뿐이다. 흥이 오르면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부르면 그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뿐이다. 춥거나 더우면 내 옷을 입으면 그뿐이고 해가 저물면 내 집에서 쉬면 그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 눈 오는 한낮, 저물녘의 노을, 새벽의 달빛은 그윽한 집의 신비로운 운치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기 어렵다. 말해 준들 사람들은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스스로 즐기다가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내 평생의 소망이다. 이와 같이 살다가 마치면 그뿐이리라.

원문

獨居則撫破琴閱古書, 而偃仰乎其間而已, 意到則出步山樊而已, 賓至則命酒焉諷詩焉而已, 興劇則歗也歌也而已, 飢則飯吾飯而已, 渴則飮吾井而已, 隨寒暑而衣吾衣而已, 日入則息吾廬而已. 其雨朝雪晝, 夕景曉月, 幽居神趣, 難可爲外人道也. 道之而人亦不解焉耳. 日以自樂, 餘以遺子孫, 則平生志願. 如斯則畢而已.

-장혼

(張混, 1759~1828), 『이이엄집(而已广集)』 「평생의 소망(平生志)」

   
해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현대인의 욕망은 자기 내부로부터 나오는 진짜 욕망이 아니라 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좇는 결핍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끊임없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이 칭찬하는 것, 남이 좋아하는 것을 좇으며 살았다. 부모가 원하는 욕망, 미디어가 부추기는 욕망을 나의 행복인 양 살아온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정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의 욕망은 어떠한 것인지, 욕망의 방향성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시인인 장혼(張混)은 적게 욕망하고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알았던 사람이다.

 

   장혼의 자는 원일(元一), 호는 이이엄(而已广), 공공자(空空子)이다. 그는 중인 출신이었다. 중인은 양반과 평민의 중간에 속한 계급이다. 중인은 사회적 차별을 받아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벼슬에 오르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어릴 적에 개에게 오른쪽 다리를 물려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다. 또한, 그는 무척 가난했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에서 자랐으며, 가난 때문에 벼슬을 했으나 봉급이 너무 작아 변변치 못한 끼니조차 잇지 못했다. 날마다 가난으로 괴로워하며 마음속에 항상 고통을 숨겼다. 가난을 통곡하고 싶었으나 감히 통곡도 못한 지가 이미 오래다.[余生於貧長於貧, 迨爲貧而仕也, 祿亦貧薄, 菽水不能繼. 日困於貧, 心常隱痛, 欲哭貧而不敢發久矣.]” 그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혼은 부잣집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허드렛일도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 나갔다. 가난을 해결할 기미가 없자 이웃에 살던 김종수(金鍾秀) 정승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요청했다. 하급의 아전자리를 얻은 장혼은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서른두 살에 교서관(校書館)의 사준(司準)으로 취직했다. 사준은 책의 교정을 맡은 직책이었다.

 

   그로부터 장혼은 평생 전문 편집자의 길을 걸었다. 중인 신분, 불편한 몸, 가난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실함을 바탕으로 다양한 업적을 쌓아 갔다. 특히 그는 아동용 교과서를 많이 출판했다. 교정을 보는 솜씨도 상당히 뛰어나 상급자의 인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이 온 나라에 퍼졌다. 궁궐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그에게 교정을 부탁할 정도였다. 책 한 권을 만들면 품계를 올려 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번번이 사양했다. “봉급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받겠지만 승진은 제가 욕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정조는 그를 기특하게 여겨 봉급을 더 올려주었다.

 

   그는 학문도 뛰어났다. 특히 시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시를 지으면 서로 읊어서 전해질 정도였다. 당시에 중인들은 인왕산 부근에서 모여 살았는데, 장혼 역시 인왕산 근처에서 시를 짓는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살 만한 집터를 구하던 중 옥류동 길목 끝자락에 있는 버려진 낡은 집을 발견했다. 좁고 기울고 허름했지만 마음에 딱 맞았다. 집 앞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고 너덧 걸음 떨어진 곳엔 여러 사람이 앉을 만한 너럭바위가 있었다. 장혼은 50관을 주고 약 삼백 평 되는 집터를 사서 집을 새롭게 꾸밀 계획을 세웠다. 그는 크고 화려한 집을 원하지 않았다. 기와도 얹지 않고 색칠도 하지 않은 평범하고 소박한 집을 짓고 싶었다. 윗글은 집을 짓고 나면 살아가고픈 장혼의 소망을 쓴 것이다.

 

   장혼은 집의 이름을 이이엄(而已广)으로 정했다. 이이엄은 ‘그뿐이면 족한 집’이란 뜻이다. 집의 이름을 당(堂)이나 재(齋)가 아닌 ‘엄’으로 붙인 것도 독특하고 ‘이이’라는 뜻을 붙인 것도 흥미롭다. 이 말은 당나라 시인인 한유의, “허물어진 집, 세 칸이면 그뿐[破屋 三間而已]”이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다. ‘이이’는 ‘~일 뿐’이란 뜻으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덥든지 춥든지 주리든지 배부르든지 어떤 상황에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이를 자족(自足)이라고 한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라야 흡족해하는 것이 만족(滿足)이라면, 자족(自足)은 어떠한 형편이든지 긍정하는 삶의 태도이다. 장혼은 자족하며 살다가 생을 마치면 그뿐, 더 이상의 욕심은 바라지 않았다. 단출한 집에서 지금 갖고 있는 것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그가 평생 소망한 삶이었다.

 

   그러나 집을 곧바로 마련하지는 못했다. 집을 짓기 위한 비용 300관을 마련하지 못해 십 년 동안 돈을 모아 간신히 집을 장만했다. 비록 비바람을 가리지도 못할 만큼 누추한 집이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울타리 옆 아내는 절구질하고, 나무 아래 아이는 책을 읽는다. 사는 곳 못 찾을까 걱정하지 마시게. 여기가 바로 내 집이라네.[籬角妻舂粟, 樹根兒讀書. 不愁迷處所, 卽此是吾廬.]”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이전 해에 그는 “굶주림과 배부름, 추위와 더위, 죽음과 삶, 재앙과 복은 운명을 따르면 그뿐이다.[其飢飽寒煖死生禍福, 聽之命而已].”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평생 되뇐 말은 ‘그뿐[而已]’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이니, 욕망을 없앨 수도 없거니와 무조건 욕망을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처럼 살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한번 떠나면 그뿐인데, 평생 남의 욕망을 욕망하다가 가버리기엔 삶이 아쉽다. 내가 가진 것을 다 누리지도 못하면서, 남의 것만 욕망하며 살다 간다. 그뿐이면 되는 삶인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욕망하며 사는구나.

박수밀
글쓴이박수밀(朴壽密)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미래인문학교육인증센터 연구교수

 

주요 저서
  • 『박지원의 글 짓는 법 』, 돌베개, 2013
  •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다락원, 2014
  •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 샘터, 2015
  • 『고전필사』, 토트, 2015 외 다수의 저역서와 논문이 있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한글서예작품집『묵향 담은 한글서예』의 출간을 끝내고

우리 세 사람은 함께 휴식시간을 갖기 위하여 여행을 계획하였답니다~ 

그리고 2017년 11월 4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공덕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나

고운샘의 주선으로 지인의 친구분 별장이 있는

옹진군의 모도로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하였어요~~유후후~~~

삼목항에서 10분 정도의 배를 타고 신도에 내려

시도를 거쳐 목적지인 모도로 들어갔지요~

신도, 시도, 모도는 각각의 섬인데

다리를 놓아 한 섬으로 이루어진 곳과 같답니다

 

별장에 도착하여 친구분과 인사를 나누고서

그분의 농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받았지요

앞에 펼쳐진 바다와 만추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었어요~

노란 들국화~~ 오가피 열매 그리고 나뭇잎에 앉아있는 무당벌레까지~

와~~ 깊은 숨을 저절로 들이 마셨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각자 챙겨 온 반찬을 차려놓고 보니

와우~~ 성찬입니당~!!

 

 

 

맛있게 점심밥을 먹고~~

친구분이 알려주신 데로 둘레길 산책에 나섰답니다

이정표~ 정감있지 않나요~~!?

 길 없음~~ㅎㅎㅎ

쭉쭉 뻗은 소나무가 청정자연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숲냄새의 싱그러움으로

우리는 연신 감탄사를 날리며 산길을 걸었답니다~~~

 

 

 

 

 

산에서 내려오니 썰물로 인해 빠져나갔던 바닷물이 들어와

훅~ 들어오는 바다내음과 함께 탁트인 풍광이 정말 좋았답니다~~

 

 

바닷가에 예쁘게 조성된 해당화 꽃길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구요~~

 

 

 

 

 

 

 

 

 

 

 

호박을 농사 지어 수확하지 않고

꼭지를 잘라 밭에 그대로 두고 있었는데

내년 농사의 거름이 되게 하기 위해서일까~

궁금했어요~~???

가을 끝자락에 피어있는 꽃들이

오후햇살에 빛나 허리굽혀 웃음 짓게 하네요~~

 

 

 

 

 

 

 

둘레길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농부의 풍성한 가을이 보였어요

튼실한 무우와 여러가지 채소들이랑요~~

 

 

 

 

 

 

 

높은 가지 위에 지어진 새집의 주인새는 높은 곳을 좋아하나 보네요~~ㅋㅋ

모과와 이름 모른 가을열매들은 잘 익어가고 있구요

가을끝을 부여잡고 있는 듯 분홍색 장미꽃은 왠지 슬퍼 보였어요~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에 넝쿨을 감고 피어있는 이 모습은

어떤 식물의 꽃일까~?? 씨앗일까~??

 

 

 

편지함에 피어있는 쇠꽃~~ 제가 이름 붙여 보았어요~~ㅋㅋ

 

 

 

마당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이랍니다~~

 

 

 

와~~~어릴 적 추억의 갈퀴를 보니 정겨워요~~^^

 

 

 

 

우리는 또 일몰을 보기 위해 친구분의 안내를 받아 행여나 보지 못할까 지름길을 선택해 급하게 갔지요

다행히 낙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답니다~~!!!

 

 

 

 

 

일몰을 보면서 셀카 놀이했어요~~ㅋㅋㅋ

 

 

벌써 저녁이 되어 맛나게 구운 고기와 산책길에 뜯은 쑥을 넣은 부추전으로 저녁을 먹구요~~

한벗샘께서 심각하게 구운 고기라서인지 정말 맛있었어요~~ㅋㅋ

이런저런 이야기 꽃에 행복한 저녁이 되었답니당~~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있었던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니 동심의 추억들이 괜스레 떠올라 가슴이 울컥해지더군요~ㅡ0ㅡ

늦도록 따뜻한 자리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며

까르르르~ 까르르르~ 웃다보니

소녀 적에 친구집에서 하룻밤 지새는 느낌이었어요~~

 

 

두분 샘~ 꿈나라 여행 잘 하셨지요~?

저도 잘 잤습니다~~

아침은 고운샘께서 준비해 온 재료로 떡국을 끓여 맛있게 먹구요~~

 

 

 

다음날은 어제 산책했던 둘레길 반대로 산책에 나섰답니다~~

산숲의 모습은 어제 보았던 청정자연에 가까운 풍경이구요

만추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펼쳐져 있더라구요~~~  

 

 

 

 

 

 

 

강돌해변으로 들어서니 바다의 풍광이 아름답게 들어왔어요~~

산길을 걸을 때는 섬인지를 모를 정도로 산숲의 자연에 흠뻑 젖어 있다가

바닷가로 내려오니 '아하~ 섬이었지' 했지요~~!!!

 

 

 

 

 

 

해변에는 오랫동안 바닷물과 바닷바람에 씻긴 강돌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강돌들 사이에는 작은 조개와 방게의 모습이 참 귀여웠어요~~

 

 

 

 

 

 

바닷물이 빠진 곳의 바위는 연한 붉은색을 띠고 있어 참 예뻤어요~~

 

 

 

 

오후에 섬을 나오는 여행 일정인지라 바닷가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내고 일어났답니다~~

그런데 산숲 산책길에 한벗샘의 스카프를 잃었죠(실은 흘린 것이 더 정확함요~ㅋㅋ)

그래서 돌아오는 길을 같은 길로 정하고 오는 길에 만난 스카프~~~

모도의 주민일지~? 여행객일지~? 따뜻한 마음 고맙구요~!!!

다시 만난 스카프는 반가웠답니다~

~

 

 

 

집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친구분께 감사함을 인사드리고 모도를 나섰지요

늘 복잡한 삶의 일상 속에서 느끼지 못한 여유를 한껏 누려서 행복한 시간이 되었어요~~

1박 2일 동안 주민을 만난 적이 별로 없는 정말 한적한~

어쩌면 자연을 그대로 품고 있는

차라리 문명의 손이 비껴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앞서는 섬이었답니다 

우리는 정말 마음과 몸을 정화시키고 모도의 따뜻함을 안고 돌아가는

행복한 여행이 되었지요~~

돌아오는 길에 모도 할머니께서 주신 아니 고운샘께서 나누어 주신

해풍으로 자란 배추로 김치를 맛나게 담았답니다~~

우리의 여행도 깊은 김치맛 나는 맛깔스런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당~~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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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2017년 9월 11일 (월)
사백아흔여섯 번째 이야기

김홍도 다시 보기

   
번역문

   김홍도(金弘道)의 자(字)는 사능(士能)이요, 호(號)는 단원(檀園)이다. 아름다운 풍도(風道)를 지닌 데다가, 마음이 활달하고 구애됨 없어 사람들은 신선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목했다. 그가 그린 산수(山水)ㆍ인물(人物)ㆍ화훼(花卉)ㆍ영모(翎毛)는 기묘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특히 신선(神仙)을 잘 그렸다. 준찰(皴擦)ㆍ구염(句染)ㆍ구간(軀幹)ㆍ의문(衣紋)을 앞 사람들에게서 본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천기(天機)를 운용하여 신리(神理)가 시원스럽고 환한 모양이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으니, 화단(畫壇)의 특출한 솜씨였다.
   정조(正祖) 때 대궐에서 도화서(圖畵署) 화원(畫員)으로 있었는데, 매양 한 폭씩 올릴 때마다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임금은 일찍이 회칠한 큰 벽에 해상(海上)의 여러 신선을 그리도록 했다. 단원은 환관에게 진한 먹물 두어 되를 받들게 한 다음, 모자를 벗고 옷을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곧장 붓 휘두르기를 비바람 몰아치듯이 하니,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완성하였다. 그림 속의 바닷물은 들끓어서 집을 무너뜨릴 기세였고, 사람들의 생동하는 모습은 구름을 뚫고 올라가듯 하였으니, 옛날의 대동전(大同殿) 벽화(壁畵)가 이보다 훌륭할 수 없었다.

원문

金弘道, 字士能, 號檀園. 美風道, 磊落不羈, 人目之以神仙中人. 畵山水ㆍ人物ㆍ花卉ㆍ翎毛, 無不臻妙, 尤工神仙. 皴擦ㆍ句染ㆍ軀幹ㆍ衣紋, 不襲前人, 自運天倪, 神理蕭爽, 奕奕怡人, 藝苑之別調也. 正廟時, 供奉內廷, 每進一畵, 輒稱旨. 嘗粉堊巨壁, 命畵海上群仙, 使宦者捧濃墨數升, 脫帽攝衣, 而立揮毫若風雨, 不數時而成. 水洶洶欲崩屋, 人踽踽欲凌雲, 古之大同殿壁, 未足多也.

-유재건

(劉在建, 1793~1880),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권8

   
해설

   준찰(皴擦)과 구염(句染)은 주로 산수화에서 구사하는 기법이다. 준찰은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주름을 넣는 기법이며, 구염은 먼저 사물의 윤곽을 그린 다음 그 안에다 색을 입히는 방법이다. 구간(軀幹)과 의문(衣紋)은 주로 인물화에 관한 용어다. 구간은 몸뚱이를, 의문은 옷의 문양을 뜻한다.

 

   대동전(大同殿)은 중국 당(唐)나라 궁전이었던 흥경궁(興慶宮)의 부속건물 이름이다. 흥경궁의 서북쪽에는 정전(正殿)에 해당하는 흥경전(興慶殿)이, 남쪽에는 대동전이 있었다. 대동전 벽에는 당대의 최고 화가였던 오도현(呉道玄)과 이사훈(李思訓)이 그린 산수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원(1745~?)이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을 필두로, 삼원삼재(三園三齋)가 중심을 이룬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ㆍ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ㆍ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ㆍ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ㆍ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1712~1786)ㆍ고송류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1745~1821)ㆍ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ㆍ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 마디로, 먼저 인품이 높아야 필법(筆法) 또한 높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풍속화가로만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단원의 신선도는 분벽에 그려졌던 「해상군선도」와 더불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소품(小品)을 몇 점이나마 볼 수 있다. 「선고지과(仙姑持果)」ㆍ「선동취생(仙童吹笙)」ㆍ「운상신선(雲上神仙)」ㆍ「신언인도(愼言人圖)」ㆍ「신선도(神仙圖)」ㆍ「선인채약도(仙人採藥圖)」 등이 그것이다.

 

▶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단원의 거작 「군선도(群仙圖)」를 빠뜨려서는 아니 된다. 바로 이 작품을 통해서 분벽의 「해상군선도」가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미루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8폭 병풍으로 이루어진 호암미술관 소장의 「군선도」는 먼저 웅혼한 구도로 구경하는 사람들을 단박에 압도한다. 그리고 멋들어진 선묘(線描)는 물론이오, 신선들이 지닌 제각각의 기발한 표정은 너나없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맑고 상쾌하면서 발랄한 분위기는 그가 왜 단원인가를 말없이, 그래서 더욱 또렷하고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회화의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큰 스케일로 소재는 아랑곳없이 자유자재의 역량을 내보이는 작가는 참으로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 기굴(奇崛)한 솜씨를 먼저 바탕으로 삼았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라고 말할 도리 밖에 없다.

 

   신선도를 그린 뒤에도 정조 임금은 그에게 금강산과 단양(丹陽)ㆍ청풍(淸風)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 등 사군(四郡)의 산수를 그리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해당 고을에 각각 명하여 그가 먹는 음식을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신하들과 똑같이 하도록 하였다. 우정 일개 화공(畫工)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특별 대우였다. 그 사랑은 결국 음직(陰職)으로까지 이어졌으니, 단원은 벼슬이 연풍 현감(延豊縣監)에 이르렀다.

 

   다음은 단원의 기개와 낭만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팔려고 했는데, 매우 기이했다. 돈이 없어 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그림을 구하고자 돈 삼천 전(錢)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이에 그는 이천 전을 덜어 매화와 바꾸고, 팔백 전으로는 술 몇 말을 받아다가 동인(同人)들을 모아 매화를 감상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남은 이백 전으로는 쌀과 땔감을 샀으니, 하루치도 되지 못했다. 그의 소탈하고 광달함은 이와 같았다.[家貧或食不繼. 一日, 有人售一梅, 甚奇. 無金可易, 適有乞畵, 贄錢三千. 乃捐二千易梅, 以八百沽酒數斗, 聚同人作梅花飮. 二百爲米薪資, 不一日計. 其疎曠如是.]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권8

 

 

유영봉
글쓴이유영봉(劉永奉)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주요 저서
  • 『고려문학의 탐색』, 이회문화사, 2001
  • 『하늘이 내신 땅』, 문자향, 2001
  • 『당나라 시인을 만나다』, 범한서적주식회사, 2009
  • 『천년암자에 오르다』, 흐름출판사, 2013 외 다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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