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번역원
고전명구
2022년 3월 23일 (수)
2021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작  
   
완전한 혼자라는 신화
   
"나는 그대가 언젠가 펼쳐질 것을 안다. 굽어 있던 것이 펼쳐지는 것은 이치의 형세이다."
 吾知子之伸有日. 旣屈則伸, 理之勢也.
오지자지시유일 기굴즉신 이지세야

- 서경덕(徐敬德, 1489~1546),『화담선생문집(花潭先生文集)』권2 「김사신자사(金士伸字詞)」

   
해설
   ‘화담 서경덕은 별다른 스승 없이 자연과 홀로 마주하여 씨름하며 학문을 깨우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 天 글자를 벽에 붙이고서 면벽 수행을 하듯 깊이 파고들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한 그가 사망한 뒤 30년가량이 지나 조정에서 추증 문제가 거론되었다.

 

   선조는 서경덕의 저서를 살펴보니 기수(氣數)에 관해 논한 바는 많으나 수신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했고 공부에 의심스러운 바가 많다며 우의정 추증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때 박순, 허엽 등 서경덕 아래 문인들이 항변했지만 이에도 선조는 끝내 의심스럽다며 주저했다. 그때 율곡은 서경덕의 공부는 배우는 자가 본받을 바가 아니고 성현의 뜻과는 거리가 있지만 깊이 생각하여 먼 곳까지 도달해 자득한 묘함이 많고 문자언어의 학문이 아니라고 말해주어 결국 우의정으로 추증되는 것이 허락된다.

    어떤 이가 소위 관직과 거리를 두며 은일했다고 하면 외부를 향한 창을 굳게 닫은 채 독야청청, 홀로 안분지족하며 지냈겠거니 치부하게 된다. 그러나 율곡이 화담을 알아준 것처럼 화담 또한 그의 벗 김한걸이 재능을 품고서도 오랫동안 굽히고 있었음을 알아주고 그가 곧 선현의 공적을 좇아 뜻을 펼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등 창을 활짝 열고 다른 이를 알아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할 것을 근심하라.’ 막상 내가 인정받지 못한 채 남을 알아주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이미 몇 번이나 마음에 아로새긴 이 경구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시대가 각박해지고 일상이 조급해질수록 사회, 특히나 문화 경향은 개인 내부를 향하게 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봐 안달이 나고 두려워져 남을 아는 것 또한 덩달아 꺼려지곤 한다. 내가 서경덕을 스승 하나 없이 홀로 고고했던 문인으로 남겨두고 싶어 한 것도 한편으로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론 위안 삼을 고고한 천재가 필요해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경덕은 자신에겐 스승이 없어 공부하는 데 무척 고생했고 뒷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의지해 공부하면 힘들지 않을 거라고 늘 말했다고 하니 완전한 홀로라는 신화는 사실 몽상에 가까웠던 걸까. 이에 앞서 무엇보다도, 굽은 것인 펴지기 마련이라는 말이 선사하는 뭉클한 위안이 나의 힘듦에 가려 잊고 지내는 친구와 가족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혼자서만 뜻밖에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버린 것처럼.

 

글쓴이홍부일
프리랜서 문학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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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2019년 9월 4일 (수)
삼백쉰두 번째 이야기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견고하다 하지 마라. 갈다 보면 뚫리는 법이니.



勿謂堅 磨則穿
물위견 마즉천


-

이가환(李家煥, 1742-1801),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하(下) 「윤배유연명(尹配有硏銘)」
   
해설
   윗글은 조선 후기 문인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이 윤배유(尹配有)의 벼루에 쓴 명문(銘文)의 일부이다. 옛사람은 벼루・연적・거울・지팡이 등 생활에 쓰이는 물건에 글을 새겼는데, 대부분 자신을 경계하는 뜻이나 물건의 연혁을 담은 내용이었다. 이글은 끊임없이 갈다보면 먹이 벼루를 뚫는 것처럼 아무리 어려운 학업이라도 성실한 자세로 끊임없이 연마하다보면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커다란 성취를 이룩한 사례는 역사에서 종종 찾을 수 있다. 초서체(草書體)로 일가를 이룬 중국 한나라의 서예가 장지(張芝)는 연못가에서 돌에 글씨를 썼다가 물로 씻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연못물이 모두 새까맣게 변할 때까지 글씨를 연마하였으며,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조선의 서화가이자 학자인 김정희(金正喜)는 칠십 평생 10개의 벼루를 뚫었고 천 여 자루의 붓을 닳게 할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사회는 성실한 노력으로 인한 성취보다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한탄과 분노만이 가득하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넘어서기가 힘든 사회적 차원의 장벽이 도처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근로 계약 형태에 따른 불평등의 장벽․성별이나 인종 등 각종 차별의 장벽・자본의 규모에 따른 불공정 경쟁의 장벽 등, 여러 사회적 장벽들이 너무나 공고하게 버티고 서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장벽은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순환 구조를 막아 건전한 사회발전을 저해한다. 우리 사회도 이러한 점을 인지하여 법적・사회적으로 장벽 허물기를 시도하고 있다. 불평등・불공정・차별을 해소하자며 국민들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차별을 금지하는 법도 일부 제정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장벽이 기득권의 카르텔과 공동체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탓에 변화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실한 노력으로 인한 성취를 저해하는 사회적 장벽이 허물어져야 비로소 개인들이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하다 하지 말고, 노력하여 허물고 또 허물어 보자.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다.
글쓴이이승철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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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2018년 8월 29일 (수)
  2017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작  
   
마음의 갈래를 잡으라
   
두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두 갈래로 내지 말고,
세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세 갈래로 내지 말며,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라.

 

 

弗貳以二  弗參以三  惟心惟一  萬變是監
불이이이  불삼이삼  유심유일  만변시감


-

이황

(李滉, 1501-1570), 『퇴계집(退溪集)』 권7「성학십도(聖學十圖)」 경재잠(敬齋箴)

   
해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퇴계가 선조(宣祖)에게 올린 학문의 요체를 나타낸 도식이다. 그는 선조가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다. 그 중 아홉 번째 「경재잠(敬齋箴)」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는 주희(朱熹)가 말한 “두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두 갈래로 내지 말고, 세 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세 갈래로 내지 말며,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라”를 말하며, 이것이 바로 경(敬)의 자세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에 집중하여 한 갈래의 마음으로 모든 일에 임하는 것은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모든 일을 진정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경(敬)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구절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主一無適)’, ‘항상 또랑또랑하게 깨어 있게 한다(常惺惺)’,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엄숙하게 한다(整齊嚴肅)’이다. 즉, 경의 자세는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다른 데 여러 갈래로 흩어져지지 않고, 항상 깨어 있으며, 단정한 몸가짐과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진정성을 나타낸다. 퇴계는 경을 그의 사상적 핵심으로 삼고, 매 순간 경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을 유지하는(持敬) 태도는 매순간 흐트러질 수 있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잡아준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패륜적, 엽기적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진정성이 매몰되고 피폐해진 윤리의식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진정한 자아를 모색하는 것은 건강한 개인과 건강한 사회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퇴계의 성학십도는 바로 이 진정성을 중심으로 한다. 두 가지 일, 세 가지 일에 마음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고는 정작 내 마음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지는 않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퇴계선생이 주는 교훈이다.

 

글쓴이박현정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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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7일 (목)
삼백스무 번째 이야기
모르는 줄 모른다
   
자신이 어리석음을 깨달은 자는 크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자신이 사리에 어두움을 아는 자는 아주 어두운 것이 아니다.

 

 

覺自迷者, 非大迷矣, 知自闇者, 非極闇矣.
각자미자  비대미의  지자암자  비극암의


-

원효

(元曉, 617~686),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해설

   일이나 공부를 좀 해 보면 알게 된다. 모르면서 아는 줄 아는 게 문제임을. 모르면서 아는 줄 알면, 무엇을 모르는지 알려고도 않는다. 모르면서 아는 줄 알면, 다른 이와의 소통과 공감이 잘될 리 없다. 그러니 문제다. 원효에 의하면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줄 모르고 사니,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모르는 줄 모르고 사니, 다른 존재와의 관계가 힘겨울 수밖에. 그러니 어리석은 줄 아는 게, 모르는 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새 삶을 열어 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원효는 수많은 저술을 집필했다. 알려진 것은 100여 종 240여 권, 현재 전해지는 것은 20여 종 20여 권이다. 대부분 불교경전에 대한 주석서인데,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비롯한 원효의 주석서가 동아시아에서 남아시아의 불교를 수용해 동아시아 불교를 정초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저술들과 달리 『보살계본지범요기』는 특정 경전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다. 보살계(菩薩戒), 곧 대승불교의 계(戒)를 지키는 것, 그 참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원효가 직접 논술한 책이다. 그래서 『지범요기』는 원효의 육성이 들리는 듯한 저술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원효가 『지범요기』를 통해 가장 경계한 것 중의 하나가 ‘자고심(自高心)’, 곧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다. 계를 형식적으로 지킨다 하여 자신을 높이는 마음을 가진다면,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불법을 좀 안다고 하여 나와 남을 차별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불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계를 지키고 불법을 따르는 참뜻을 어기게 됨을 논한 것이다. 이처럼 『지범요기』는 불교에 대한 이론적 성찰이면서 불교계에 대한 현실적 비판으로 읽힌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성직자라고 해서, 공직자라고 해서, 지식인이라고 해서 자신을 높이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본분을 다하지 못할 공산이 크지 않을까.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그 참뜻을 자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참뜻은 뭘까.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알아차리기 위함인 것 같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자고심을 경계하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

글쓴이손성필(孫成必)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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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0일 (목)
삼백열세 번째 이야기
타고나기는 쉬워도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학문이 몸에 배어 이루어진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美質之稟於天者易得 而學問之得於己者難矣
미질지품어천자이득 이학문지득어기자난의


-

권근

(權近, 1352~1409),『양촌집(陽村集)』 권15 「이반(李蟠) 군에게 주는 서문[贈李生蟠序]」

   
해설

   양촌 권근이 2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막 과거에 급제했을 때, 양촌의 할아버지인 성재(誠齋) 권고(權皐) 선생이 양촌에게 아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네 증조할아버지인 문정공(文正公 권보(權溥))은 충렬왕 때 과거시험을 주관하신 분인데, 이 시험에서 익재공(益齋公 이제현(李齊賢))도 너처럼 젊은 나이에 급제하였단다. 문정공은 학문에 힘쓰는 익재공의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사위를 삼기까지 하셨지. 익재공은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학문에 힘써 어떤 사람이 어느 책에 정통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배웠고, 누구에게 좋은 책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그 책을 빌려다 밤을 낮 삼아 날마다 부지런히 읽곤 했단다. 어느 날인가 집에 문정공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마침 익재공이 옆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단다. 그런데 책 읽는 소리가 좀 컸는지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구나. 그래서 문정공이 책을 그만 읽으라고 했다지. 그런데도 익재공은 목소리를 낮추고 계속 읽었단다. 이렇게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나라의 큰 인재가 되었듯이, -중략- 너도 과거 급제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익재공을 본받아 부지런히 노력하도록 하여라.”

 

[先君菊齋文正公爲貢擧時。益齋李文忠公。年未冠擢高科。好學不已。公嘉之。遂舘甥焉。文忠聞某有善治某書。必往受業。聞某有某書。必借讀之。日孜孜而夜繼晷也。往往先君有賓客。隔壁讀書。聲亂賓主之言。則命止之。而猶低其聲而未嘗輟也。學以日進。華問以日播。大爲宣廟器重。-中略- 汝毋安於小成。以效文忠之所爲毋怠。]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주관한 과거에 급제한 익재공이 부지런히 공부해서 나라의 큰 인재가 되었듯이, 너도 자만하지 말고 익재공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큰 인재가 되라는 축원을 젊은 손자에게 전하신 셈입니다. 과연 열심히 공부하여 큰 인재가 된 양촌에게 이번에는 웬 스님이 세 번씩이나 찾아와, 자질이 훌륭한데다 공부도 열심히 하는 젊은이의 앞날을 위해 보탬이 될 만한 글을 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다름 아닌 익재 이제현의 손자 이반(李蟠)이었습니다.

 

   양촌은 이반에게 자신이 옛날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익재공의 일화를 전해주었습니다. 이어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학문이 몸에 배어 이루어진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하고, 마지막으로 부탁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자네가 자네 할아버지를 모범으로 삼아 학문에 힘쓴다면, 훗날 조정에 나가 배운 것을 마음껏 펼쳐 도덕(道德)이든 공업(功業)이든 자네 할아버지에 부끄럽지 않게 될 걸세.”

 

   얼핏 보면 양촌 선생의 말씀은 ‘타고나는 것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교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분들의 관계입니다. 양촌 증조할아버지의 사위가 익재이니, 익재의 손자인 이반은 양촌과 사돈 사이입니다. 양촌이 젊은 시절 이 얘기를 듣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익재 같은 대학자로 성장하였는데, 이제는 거꾸로 그 손자에게 이 얘기를 전해주게 되었으니, 양촌으로서는 옛날 일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했을 것입니다. 이반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생생한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으니 남다른 감동이 일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증조할아버지 얘기를, 증조할아버지 사위의 손자에게 다시 전해 주는 이런 아름다운 이어짐에 가슴 뭉클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자녀교육은 가정교육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정교육의 범위가 집에서 함께 사는 가족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셔서 뵐 수 없게 된 선조(先祖)들의 일화를 자손들이 전해 들을 수 있다면, 이 또한 훌륭한 가정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집안 어른이나 가까운 지인들을 통해 이런 가정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이제는 가족의 범위가 너무 좁아져버려 이런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복잡하게 꼬여버린 교육 문제의 원인 중에 이런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글쓴이이규옥(李圭玉)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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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5일 (수)
  2016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작  
   
익숙함을 돌아보라
   
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평범한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이 많다.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달사무소괴, 속인다소의.

 


-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巖集)』 권7 별집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해설
   이 글은 연암이 박종선(호 능양(菱洋), 박지원의 조카)의 시집에 서문으로 써 준 글이다. 연암이 그를 ‘동방의 대가’라 칭찬할 만큼 시에 능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격식에 맞지 않는 그의 시를 이상하다며 폄하하고 비난했던 것 같다. 이에 연암은 그의 시 짓기를 격려하며 위와 같은 말로 서문을 시작한다. 새로운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게 보일 뿐이니 비난에 굴하지 말고 더욱 노력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평범한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이 달관한 사람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 걸까?

 

   연암의 말을 더 들어보자.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빛이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噫。瞻彼烏矣。莫黑其羽。忽暈乳金。復耀石綠。日映之而騰紫。目閃閃而轉翠。然則吾雖謂之蒼烏可也。復謂之赤烏。亦可也。彼旣本無定色。而我乃以目先定。奚特定於其目不覩。而先定於其心。]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미 정해진 어떤 틀에 의해 판단한다. 우리는 구별할 수 없는 초록색을 여러 가지 다른 초록색으로 구별하는 밀림의 부족도 있다. 살아가는 환경, 문화, 시대에 따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도수가 정해진 익숙한 안경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미 맞춰 놓은 시선에서 벗어나는 사물을 보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검은 까마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까마귀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다”는 말조차 이상하게 들린다. 그에게 낯선 것이란 새로운 것, 이상한 것, 괴이한 것이다.

 

   반면에 달관한 사람[達士]은 자기에게 씌워진 익숙한 안경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에게 새로운 것이 이상한 것이 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시선에 대상을 맞추는 게 아니라 대상을 향해 자기 안경의 도수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물의 다른 면모를 보지 못한 자신의 고정된 시선이 문제이지, 대상이 본래 이상한 것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달관한 사람에게는 이상할 것이 없고, 그로 인해 차별하거나 배척할 것도 없게 된다. 하지만 익숙한 시선, 편안한 상식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익숙함과 편안함을 버린다는 것은 불안함으로 뛰어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이런 불안을 갈고 닦아 남들도 다 아는 언어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조차 낯설게 볼 수 있는 시인의 능력, 이것이 타인과 소통하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저 사람이 처한 상황과 환경으로 뛰어들어 헤아려보기, 진정 역지사지(易地思之)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딛고 있는 단단한 땅부터 벗어나야겠다. 그곳에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이 기다리는 문이 있을 것이다.
글쓴이신부순
구리여자고등학교 교사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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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3일 (수)
  2015 '한국고전종합DB' 활용 공모전 고전명구 부문 당선작  
   
복을 아껴야 한다
   
일은 완벽하게 끝을 보려 하지 말고,
세력은 끝까지 의지하지 말며,
말은 끝까지 다하지 말고,
복은 끝까지 다 누리지 말라.

 

 

事不可使盡, 勢不可倚盡,
사불가사진  세불가기진

言不可道盡, 福不可享盡.
언불가도진 복불가향진


-

허균

(許筠 1569~1618),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한정록(閑情錄)」 11권 「명훈(名訓)」

   
해설
   「명훈」은 『근사록(近思錄)』『주자전서(朱子全書)』『사자수언(四字粹言)』『공여일록(公餘日錄)』『문선(文選)』 등 15종의 자료를 바탕으로 고인(古人)의 말이나 시구에서 훈계가 될 만한 것을 채록하여 총 68칙을 실은 것이다.

 

   윗글은 허균이 명나라 탕목(湯沐)이 지은『공여일록』에서 장무진(張無盡)의 ‘석복(惜福)의 설(說)’을 정리한 것이다. ‘석복’이란 복을 아낀다는 뜻으로,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을 소중히 여겨 더욱 낮추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말한다. 예로부터 수행자들에게 필수적인 교훈이어서 석복수행(惜福修行)이라고도 했다. 이 교훈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혜훈(惠訓)이다. 때문에 많은 현자(賢者)가 ‘석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고이래로 성현(聖賢)이 ‘석복’에 관한 교훈을 많이 남긴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멈춤의 미학’, '절제의 미학‘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허나 이를 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유(思惟)가 깊어 자기 성찰과 함께 중용, 균형, 멈춤의 미학을 깨달아야만 가능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끝장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이다. 사상, 이념, 정치, 역사, 권력, 명예, 심지어 사랑까지 끝장을 보려고 한다. 결코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법이 없다. 이제는 먹는 것까지 끝장을 보려 한다. TV에선 ‘먹방’에 관한 방송이 온종일 끊이질 않고, 막장 드라마와 인터넷 방송에선 말초적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잔혹한 방법과 패륜이 총동원되고 있다.

 

    수양과 달관(達觀)을 통한 영적 발전을 이루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止)’이다. 멈출 때 멈출 수 있어야 하고, 또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한다. 혼탁한 이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멈춤의 미학이다. 멈춤이 제대로 작동 되지 않는 사람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같다. 이는 쇠함과 성함이 돌고 돌아 순환하는 게 우주의 법칙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 무엇이든 성(盛)이 있으면 반드시 쇠(衰)가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한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하지가 지나면 동지를 향해 조금씩 가고, 동지가 지나는 순간 하지를 향해 나아간다. 초승달은 반달을 거쳐 보름달이 되고, 보름달은 다시 초승달이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계속 순환 반복한다. 이 순환의 법칙은 우주에서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인간은 무엇이든 끝까지 누리면, 쇠할 때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많이 가졌던 만큼, 끝까지 향유했던 만큼, 절정으로 즐거워했던 만큼, 상실의 폭 또한 깊고 넓다. 이는 우주의 엄혹한 법칙이다. 인간세(人間世)엔 결코 영원불변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행복할수록, 일이 순조롭게 풀릴수록, 더욱 근신하고 몸을 낮춰야 한다. 선한 일을 많이 행하고, 복을 아껴야만 한다.

 

글쓴이김시연
작가, 인하대학교 한국학과 역사전공 박사과정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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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0일 (목)
이백아흔두 번째 이야기
아들에게 바란다
   
공정하면 사심이 없으니, 마음이 맑아 욕심이 없다.
모든 일을 합당하게 하니, 이것을 정직이라고 한다.

 

 

公則不私, 心淸無欲. 事出至當, 是謂正直.
공즉불사 심청무욕  사출지당  시위정직


-

권근

(權近, 1352~1409), 『양촌집(陽村集)』 권23 「제사자명시아자길천군규(題四字銘示兒子吉川君跬)」

   
해설
   이 글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자신의 셋째 아들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준 명문(銘文)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마음에 새기고 살기를 바라는 네 가지를 글로 지어 주었는데, 이것은 공정함[公], 부지런함[勤], 너그러움[寬], 신의[信]입니다. 위의 글은 그 중 첫 번째 덕목인 ‘공정함’입니다.

 

   세상에 나가 여러 가지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능력이 필요합니다. 독서를 많이 해서 견문을 넓혀야 하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의지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심 없는 공정한 마음입니다. 사심 없이 공정한 마음으로 일할 때 결과적으로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니까요.

 

   오늘날 우리 부모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유학 간 자식을 위해 몇 년씩 기러기 부부로 살기도 하고, 자식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모가 힘든 일을 마다치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희생 위에 자란 자녀는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것만 가지고 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옛날 분들은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더 강조하였습니다. 바른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공정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며, 남들에게 너그럽고 미더운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바른 인간이 되는 바탕입니다. 아버지에게 이런 올바른 교육을 받은 덕분일까요? 권규의 바른 행실을 눈여겨본 태종(太宗)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셋째 딸 경안공주(慶安公主)를 그와 혼인시켜 부마(駙馬)로 삼았습니다.

 

궁금해 못 견디실 분들을 위해 나머지 명(銘) 세 가지도 소개합니다.

 

      부지런함[勤]

 

부지런하면 게으르지 않으니, 열심히 노력하여 허물이 없다.
직무에 소홀하지 않으니, 이것을 충현(忠賢)이라고 한다.

 

勤則不怠, 孜孜罔愆. 職無廢弛, 是謂忠賢.
근즉불태 자자망건  직무폐이 시위충현

 

      너그러움[寬]

 

너그러우면 가혹하지 않으니, 하는 일이 다 어질고 후하다.
군자의 덕은 그 경사가 후세에까지 전해진다.

 

寬則不苛, 事皆仁厚. 君子之德, 慶流于後.
관즉불가 사개인후  군자지덕 경류우후

 

      신의[信]

 

미더우면 경망하지 않나니, 유지하기를 성심으로 하여,
그 뜻을 굳게 지키고 멋대로 변경하지 마라.

 

信則不妄, 持之以誠, 堅守其意, 毋自變更.
신즉불망 지지이성  견수기의 무자변경

 

 

글쓴이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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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2016년 6월 16일 (목)
이백아흔한 번째 이야기
익숙해질 때까지
   
성인(聖人)이 성인이 된 까닭은
‘숙(熟)’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숙(熟) 자를 깊이 음미해 보면
그 의미가 무궁하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聖人之所以爲聖人, 不過一熟字耳.
성인지소이위성인  불과일숙자이

深味熟字, 其意味無窮, 豈不好乎!
심미숙자  기의미무궁 기불호호


-

임성주

(任聖周, 1711~1788), 『녹문집(鹿門集)』 권17 「한천어록(寒泉語錄)」

   
해설
   1730년, 녹문(鹿門) 임성주는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를 뵈었습니다. 젊은 녹문은 노성한 도암에게 그간 학문하며 의문스러웠던 점을 여쭈었습니다. 「한천어록」은 그때 도암과 녹문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문답식으로 정리해 놓은 글입니다.

 

   녹문이 그 유명한 『논어』의 맨 첫 장,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 대해 묻자 도암은 자세하게 답을 해 주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이 성인이 된 까닭은 ‘숙(熟 익숙함)’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숙(熟)’ 자를 깊이 음미해보면 그 의미가 무궁하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알면 제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성리학의 기본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배우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배워서 알게 된 것을 때때로 익혀서[時習]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도암은 여기에서 ‘숙(熟)’ 한 글자를 강조합니다. 배운 것이 진정 내 것이 되려면 완전히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성인(聖人)들도 사실 익숙해질 때까지 자신이 배운 것을 익힌 사람들이었지, 처음부터 우리와 바탕이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도암은 녹문에게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고, 익숙해지도록 해서 종국에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는 공부를 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현대인과 공부(工夫)의 목적도 다르거니와 공부 과정 역시 다릅니다. 지식의 홍수라고 할 만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느 한 가지만 진득하게 탐구할 여유가 없습니다. 더 많이 보려 하고 더 많이 얻으려 해서 조금이라도 진척이 보이면 어서 빨리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옛사람들이 특히 경계했던 것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진득하게 노력하여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렇듯 옛사람들의 방식은 ‘더 빨리 더 많이’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반성(反省)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글쓴이하기훈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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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2016년 6월 2일 (목)
이백아흔 번째 이야기
칭찬도 과유불급
또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는
역시 걸맞은 실상이 있어야 합니다.
저 긍섭이 일찍이 옛 성현의 글을 보니,
남을 하늘 위로 추어올리고
스스로는 낮은 곳에 처하는 말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且自牧以尊人, 亦有其實.
차자목이존인  역유기실

兢嘗竊觀古聖賢文字,
긍상절관고성현문자

曾未有吹人天上、自處汚下之言.
증미유취인천상   자처오하지언


- 조긍섭(曺兢燮, 1873∼1933), 『암서집(巖棲集)』 권7, 「상곽면우선생(上郭俛宇先生)」

해설
   2002년에 나온 밀리언셀러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켄 블랜차드가 쓴 이 책은, 그 책장을 넘겨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제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녀노소 누구나 ‘칭찬’하면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대한민국에 칭찬 열풍을 몰고 온 이 책 덕분에 칭찬에 인색하던 우리 사회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나의 긍정적인 태도와 관심과 칭찬이 상대를 바꿀 수 있다는 이 메시지에는 사람의 실제 행동을 잘 이끌어내는 밝고 따뜻한 힘이 있으니, 상당히 훌륭한 대인관계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요즘 매스컴이나 SNS상에 넘치는 과도한 칭찬들을 보다 보면, 이 칭찬 열풍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서 범람하는 오버액션이나 지나친 칭찬을 접할 때면 공감은커녕 괴리감이 들면서 언짢아지곤 한다. 실상과 동떨어진 칭찬은 오히려 아부에 가깝다. 칭찬하는 사람은 할 때는 비굴하고 돌아서면 민망하며, 받는 사람 역시 그것이 과분함을 알기에 받을 때는 흐뭇하나 돌아서면 찜찜하다. 그러니 피차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설령 아부하려는 의도 없이 그냥 서로 간에 듣기 좋자고 하는 칭찬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런 칭찬을 주고받다 보면 정작 꼭해야 하는 비판을 꺼리게 되어 직시해야 할 문제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실정에 맞는 칭찬을 강조한 위 편지의 글귀는 경청할 만하다. 조긍섭은 조선 말기의 학자이고, 면우(俛宇)는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호이다. 면우는 당시 영남의 큰 선비로, 유생들이 연서(連書)한 독립호소문을 파리강화회의에 발송했다가 투옥되어 병사한 독립투사이기도 하다. 자신보다 27살 아래인 조긍섭의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에 대한 질의와 논변에 대해, 면우가 “고명하고 탁월하다”, “앞으로 가르침을 구하도록 하겠다”라고 칭찬하자, 그 말씀이 지나치다며 이렇게 정색을 하고 질정에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사제 간이나 친구 사이에, 실상과 상관없이 서로 추켜세우고 겸손을 부리는 말과 모습을 일삼다 보니 경박하고 가식적인 풍조[澆僞之風]가 만연하게 되었다고 꼬집었다.

    칭찬은 인간관계의 윤활유이지만, 이 또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인색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게, 그리고 실정에 맞게 칭찬하는 적정선이 필요하다.

 

글쓴이박은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전문위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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