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궁체의 예술성」
꽃뜰 이미경(1996년 5월 21일)
우리나라 글자는 서사를 목적으로 한 글씨라 예술성이 부족하다고들 한다.
세계 어느 나라 글자든 처음에야 의사 전달의 기호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필기구와 서법이 발달함에 따라 시각적인 관점에서 예술성이 가미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사만을 목적으로 했던 조선조 중종 때까지는 한글에서 예술성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필묵을 가까이 하는 서사 상궁들의 서법과 서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궁체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고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격조 높고 세련된 궁체의 완숙미를 보였던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필사를 평생의 일과로 하는 상궁 나인들에도 작용하여 오늘날과 같은 예쁜 궁체 글씨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서예가 미술적인 면에서는 예술성이 낮다고들 한다지만 이는 소리글자인 우리 서예가 미술 쪽보다는 음악과 문학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문학과 음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시간 예술이듯이 시간 예술이듯이 궁체 서예는 그 운필에 따라 강약의 조화를 이루며 율동적으로써 나가는 것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고 그 율동미 억양 속도에서 시간성을 연상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음악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국악에 있어서 감정 표현을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절제한 것을 정악이라고 한다. 유한하고 평화롭고 고아한 정악은 느린 것이 특징이다. 속악에 있어서 빠른 곡은 장단 고저의 많은 변화가 감정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다. 속도가 느린 정악은 음악성에 있어서 그 기술이 더 어렵기 때문에 음의 강함과 유함의 농담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 궁체도 강한 힘은 획 속에 숨기고 겉은 유한 필법 즉 힘의 강한 표현이 절제된 고아한 품격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그 속도가 빠르지 않다.
속도가 빠른 진흘림은 리듬감을 표현하기가 쉽지만 정자나 반흘림은 획에 있어서 강약의 표현이 진흘림에서보다 어렵고 선질에 있어서 밀도 높게 다져진 세련미가 훨씬 더 요구된다.
그러므로 궁체는 획의 절제된 강약의 표현과 세련된 선질과 율동적인 운필에서 그 예술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궁체는 정교하고 섬세한 예술이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필법이 무시된 교한 글씨도 안 되지만 필법에만 의지하고 스스로 얻어낸 묘가 없는 것도 물론 안 된다.
오랜 공부에서 자기의 멋이 우러나야 예술성이 나타난다. 이렇듯 궁체를 공부함에 있어서 많은 세월이 필요하고 풍부한 감수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궁중에서 어린 소녀들에게 일찍부터 글씨공부를 시켰던 것이고 이것은 음악에 있어서 조기 교육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궁체 예술의 특징은 정성이 담긴 정교한 솜씨의 전문성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참되고 착하고 정성스런 마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곡진한 마음이 없이는 궁체의 정신을 나타내기 어렵다. 음이 모여 동기가 되고 악구가 되고 악절을 이루듯 점과 획이 모여 글자를 이루고 낱말을 이루고 귀절을 이룬다. 성악에 있어서 호흡이 중요하듯 글씨에 있어서도 호흡이 자연스러워야 글씨가 편안하다.
또한 줄글이나 시에 따라 쓰는 이의 감정이 거기에 나타난다. 이와 같이 글의 호흡에 맞춰 쓰는 이의 감정이 필순에 따라 다양한 선질로 지면에 나타날 때 조형미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한글 서예는 필법과 필세의 기본적인 기법으로 우리 글귀의 호흡에 맞춰 음악적인 리듬의 운필이 자유로울 때 예술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 중의 하나다. 세종대왕 시절 한글을 만들어 낸 학자들이 우리 글자를 많이 사용하면서 읽히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씨를 그 목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궁들의 예술적인 안목과 창의력으로 삼백 년 동안 꾸준히 가꾸어 오는 동안에 소리글자를 이렇게 훌륭한 예술로 승화시킨데 대해서 놀라움과 고마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꽃뜰 이미경 100세 특별전』서집에서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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