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여정
나는 정암 조광조 할아버지의 17대 손녀로 태어났다. 1934년생 개띠. 2남 2녀 중 막내이다.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붓글씨를 썼다. 그 시절에는 왜정시대여서 학교에서 습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은 누구나 다 붓글씨를 썼다. 5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6학년 때 군 대항 대회에 나가서 학교대표로 상을 받았는데 지금 그 작품이 남아있지 않다. 고등학교 2학년 때(6. 25 직후) 이철경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때 선생님의 권유로 서예대회에 나가서 수상하였는데 역시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학교에 서도반이 조직되었고 책걸상도 없는 교실 마루바닥에 엎드린 서도반 친구들이 모여 서예연습을 하곤 하였다.
1962년 나는 결혼을 했고 삼남매를 두었다. 1972년 이철경 선생님 금란여고 교감 시절, 공사다망하신 관계로 나는 꽃뜰 이미경 선생님께 인계되었다. 기초 연습부터 작품구성에 이르기까지의 자상하고 철저하신 지도로 나의 오늘이 있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 수요회원들은 꽃뜰 이미경 선생님의 인솔하에 낙선재 정서각에 가서 옛 어른들의 육필을 직접 감상하고 임서를 하던 기억들은 지금도 가슴속에 고귀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서예에 대한 심오한 이론은 잘 모르더라도 나는 반듯하게 앉아 먹을 갈고 붓을 잡은 후 옷깃을 여미고 글씨를 쓰는 그 순간이 좋아서...
한 때 오랫동안 공모전에 시달리면서 힘들고 괴롭기도 했지만, 그러나 시간을 잃어버린 채 연습에 몰두했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글씨는 익어갔고 그 사회에서 지나치게 뒤지지 않는 내가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음악을 들으며 리듬에 맞추어 붓글씨를 쓰노라면 이 세상의 행복은 다 내것이요 스스로 황홀경에 빠지는 신비의 세계. 나만의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무아지경에 빠진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붓을 잡고 평범한 행복속에 음악을 들으며 붓글씨를 쓴다.
돌아보니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가족보다는 내 행복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침이고 저녁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글씨에 몰두했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도 못해 먹였고 많이 놀아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고3시절 늦게 귀가하는 시간까지 또 남편이 늦게 돌아오는 시간까지 나는 글씨를 썼으나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거나 짜증이 나거나 초조하지는 않아 좋았던 것 같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제때에 못 담고 뒤늦게 부랴부랴 담구던 일, 겨울 옷을 미리 준비 해 두지 못해서 추워도 못입고 나가던 일, 이런저런 일들은 아마 동료들은 다 같이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특히 남편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깊다. 때때로 일본에 가면 일정이 빽빽한데도 불구하고 나라에까지 가서 지필묵을 사다 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던 그 말 한마디...
나는 용기백배 그 말에 보답하기 위해서 꾸준히 공부했다. 가족들이 있어 소중한 사랑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서예는 나의 인생이요 나의 정신이며 나의 철학이요 나의 모습이다. 얼마 전부터는 서예이론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뜻을 같이 한 동료들이 모여 "한국한글서예연구회"를 1998년에 발족하여 오늘 현재까지 서예와 관계가 깊은 국문학계 교수님, 서울대 김진세 명예교수님, 연세대 홍윤표 교수님을 초빙하여 강의를 들으며 차곡차곡 이론을 다져가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해 본다.
끝으로 이미경 선생님의 연세가 93세이신 관계로 괴롭혀 드리지 않기 위하여 이번에 축사를 못 받았다. 서운하지만 자연의 순리에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부디 건강하시고 백수를 다 하시기를 기도 드린다.
샌날 · 초림 조성자(趙成子)
[경력]
1995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우수상 수상(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갈물한글서회 고문
故 갈물 이철경 선생 사사
꽃뜰 이미경 선생 사사
日本 東京 故 靑山杉雨 선생 사사
[저서]
2000 농가월령가, 옥루연가(공저, 해오름한글서회)
2001 궁체이야기(공저, 한국한글서예연구회)
2003 역주 낙성비룡
2004 여사서(공저, 해오름한글서회)
2006 조선시대 문인들과 한글서예(공저, 한국한글서예연구회)
2009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한글궁체사(공저, 한국한글서예연구회)
[학술발표]
2006 "한글서예의 개관" 연구발표(한국서학회와 미국 U.C.L.A공동주최)
[2010 갤러리 각 기획초대전 현대 한글 서예의 역사 50년 샌날 조성자 초대전 작가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