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청 2012. 1. 10. 15:13

궁체(宮體)

   조선 시대에, 궁녀들이 쓰던 한글 글씨체. 선이 맑고 곧으며 단정하고 아담한 점이 특징이다. 국립국어연구원 편『표준국어대사전』


  “궁체는 궁녀들이 쓴 글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궁녀라고 아무나 다 이 궁체를 썼던 것은 아니다. 이 궁체는 지밀에 소속된 궁녀들이 배우고 익힌 글씨인데 그 익히는 과정이 특수하다 할 만하다. 4세라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온 아기나인들이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글씨공부는 해야만 하는데 그날 쓴 그 분량이 계획된 소정의 분량 만큼에 미치지 못하였거나, 또는 글씨의 질이 바라던 만큼의 수준에 다다르지 않으면 밥도 주지 않고 글씨 쓰기 공부를 시켰던, 가혹하리만큼 엄한 교육과정을 거쳐서 쓸 수 있게 된 결과물이 바로 궁체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궁 안의 다른 부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지밀에서만의 서예 교육인 것이고 그 산물인 것이다.”

♣ 한국한글서예연구회,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한글궁체사』다운샘, p.52 ♣ 

 

  “『내훈』의 규율을 바탕으로 생활하여야 하나 그들에게는 일정한 봉사를 해야 할 임무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는 없다. 그들이 수행해야 할 모든 것은 엄격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직무수행만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자율적인 개성의 표출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궁녀들은 법에 맞는 글씨를 써야만 했다. 이것이 궁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체를 접할 때 그 점획(點劃) 속에 감추어진 정신, 겉으로 보이지 않는 그 숨결을 찾아 읽어야 할 것이다.

  생성(生成) 당시의 궁체에는 흘림체라는 글씨꼴이 있을 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궁체라는 것은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에게서 비롯된,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상황에서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70여 년 후 문정왕후가 또 10년에 가까운 오랜 동안 섭정을 했기 때문에 이 궁체는 그 원형을 지키면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소설문학의 대중화로 독자들의 수는 크게 늘게 되자 세책방(貰冊房)이라는 새로운 업종(業種)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세책방에서는 남성들의 글씨보다는, 아담하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쓴 읽기 편한 궁녀들의 글씨를 선호하는 독자들을 생각해서 소설 필사(筆寫)의 축을 궁녀에게로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세책방에서는 휴가를 나오는 궁녀들과 접촉해서 그들에게 소설필사의 청탁을 하게 되었고, 궁녀들은 궁핍한 부모의 삶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그 청을 받아 필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허락된 휴가는 짧고 써야할 분량은 많은 터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니 운필에 속도를 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필연으로 흘림이라는 서체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궁체의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 오게 되었고, 그것이 곧 궁체의 흘림이라는 한 독특한 자체(字體)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한글서예연구회,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한글궁체사』다운샘, pp. 48~49 ♣


  “궁체(宮體)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여 생긴 서체 또는 필체인데 궁중에서 생긴 서체라고 하여 궁중서체(宮中書體)라고 하며 이 궁중서체를 줄여서 궁체라고 한 것이다. 

  궁체가 생긴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글 필사체 중에서 제일 먼저 생긴 정음체는 반듯하게 써서 판독하기는 쉬우나 쓰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고, 한자 서체를 모방한 방한체는 쓰기에는 빠르고 편하나 판독하기 어렵고 일부층에만 쓸 수 있기 때문에 일반화되기가 어려운 점이 많았다. 또 한글·한자를 혼용하는 혼서체 역시 쓰기에 곤란하고 일부 계층에만 쓸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이상의 3가지 필사체를 보완하는 한글 고유성에 적합한 이상적인 서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로 한글의 생활화가 활발해지자 궁중에서도 교서(敎書), 언간, 전교(傳敎) 등에 종사하는 서사상궁(書寫尙宮)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모든 계층에서 한글의 필사화가 절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아름답고 쓰기 쉽고 독창성 있는 서체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먼저 궁중에서 고안되어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긴 서체가 바로 궁중서체인 궁체이다.

  궁체의 창안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오랜 기간이 지나오면서 차츰 아름답게 다듬어져 오늘날에 발견되는 높은 경지의 궁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궁체의 생성 변천 과정을 살펴보려면 먼저 정음체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초기 고딕형(전서형)의 정음체에서 후기 필사형의 정음체로 점점 변화하였고, 이 정음체가 방한체(선조·인목대비·효종·인선왕후 어필)에서 더욱 필사화되었고 다시 같은 방한체형인 현종어필에서 궁체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종조(1660~1674)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궁체는 숙종조(1675~1720)에서 단아한 듯하면서 필력이 살아 있는 숙종어필, 인현왕후어필에서 더욱 발전된 글씨로 변하였다. 이때를 궁체의 완성 시기로 보는데 이 궁체는 더욱 발달하여 영·정조(1725~1800)에 이르러 더욱 완숙하고 찬연한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궁체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 궁중과 일반에서 쓰여져서 현재에 많은 궁체 전적들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 궁체는 당시에 편지쓰기, 소설베끼기 등 문자생활을 위한 수단으로 썼을 뿐 예술적인 면에서의 작품화를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필사 연대, 필사자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 또한 당시 궁체의 필사는 예술성에 근거를 두고 썼던 것이 아니고 궁중이나 상류가정에서 필수, 교양으로 썼기에 글을 쓴 사람의 재질과 성격에 따라 아름답고 개성이 특출한 필체가 생긴 것이다.”

♣ 박병천,『한글궁체연구』일지사, pp. 117~118 ♣


  "頒布體가 解讀에는 편리하였으나 書寫에 困難하였고, 效顰體가 쓰기에는 편리하였으나 解讀에 불편한 까닭에, 이 兩者를 止揚해서 國文字의 固有性에 알맞는 理想的인 書體가 또다시 要求된 것은 필연적인 現象이었다.

  <王朝實錄>을 통해서 보건대,「諺文」의 使用은 宮中에서 더욱 活潑하였고 政治文書에까지 參與하였다. 또, 宮中에는 중기 이후로 書寫尙宮이 그 수가 증가하게 되고, 朝野間의 交通도 상당히 活潑하였으니, 理想的인 國文書體의 연구와 그 필요성은 宮中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다.

  드디어 宮中에서 쓰인 書體가 標本이 되어 새로운 書體가 普遍化되었으니, 이것이 소위「宮體」라고 일컬어졌으며, 肅宗代엔 그 完成을 보았으리라는 實證을 肅宗과 仁顯王后 筆蹟에서 볼 수 있으며, 전자는 雄壯한 男筆의 象徵이며, 후자는 纖細한 女筆의 標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嚴正·端雅美麗·圓滿을 그 屬性으로 볼 수 있는 이 書體는 종전에 볼 수 없는 審美的인 境地에까지 到達하였으니, 爛熟相을 朝鮮朝 말기의 純元王后 筆蹟에서 용이하게 볼 수 있다. 宮體가 現代까지 그대로 傳統을 維持하고 있음을 볼 때, 그것이 國文書體의 理想點에 到達한 것이 아닌가 한다.”

♣ 金一根,『諺簡의 硏究』건국대학교출판부, pp. 142~143 ♣

 

♣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한글궁체사』한국한글서예연구회, 다운샘, 2009

『한글궁체연구』박병천 지음, 일지사 

『언간의 연구』김일근 저, 건국대학교출판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