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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이 책을 지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가지 체재로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가어』, 『국어』, 육가의 『신어』, 유향의 『설원』, 중장통의 『창언』은 그저 한 글자만으로 이름을 지어 어, 설, 언이라 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문장에는 시, 부가 있고, 서, 기, 논책이 있고, 비, 지, 행장이 있고 서, 소, 잡저가 있어 문체가 하나만이 아니라 한마디 말로 포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유나 소식 이후로는 통칭하여 ‘집’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새로 간행된 허미수 문집을 보면 시, 부, 서, 기 등 여러 작품이 모두 실려 있는데도 ‘기언’이라 이름 붙여 놓았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는 아마도 평생 옛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옛사람의 책 이름을 모방하고 싶어서였을 터인데, 옛것을 좋아하기는 하나 재단할 줄 모른다고 할 만하니 그 폐단이 고루하다.
古人著書。自首至尾。皆一法一體。故如家語,國語,陸賈新語,劉向說苑,仲長統昌言。只以一字命名曰語。曰說。曰言。而後世文字。有詩, 賦。有序,記,論策。有碑,誌,行狀。有書,疏,雜著。文體不一。不可包以單辭。故昌黎,東坡以下。統而名之曰集。以此也。今見新刊許眉叟文集。詩,賦,序,記等諸作具載。而名之曰記言。有未可曉也。盖其平生好古。故欲倣古人書名。而是可謂好古。不知裁。則其弊也固也。- 김주신
(金柱臣, 1661~1721) 『수곡집(壽谷集)』 권11, 「산언(散言)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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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텍스트는 텍스트에 부가된 부속물로 판형, 장정, 종이, 글씨체, 자간, 행간, 표지, 표제지 등의 물리적 장치를 포함하여 제목, 서발문, 목차 등과 같이 책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본문 텍스트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페리텍스트와 책에 대한 논평이나 일기, 책광고 등과 같이 책의 외부에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관련된 에피텍스트로 구성된다. 이를 이론화한 제라르 주네트의 책 이름이 『문턱』이다. ‘문턱’이란 서명이 암시하듯이, 이 파라텍스트는 책, 저자, 출판자, 독자 사이에서 본문 텍스트를 읽기 위한 중개 역할을 하는 장으로 책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현관’과 같다. 특히 책 이름은 책의 성격을 지시하는 동시에 책의 내용을 암시한다.
허목의 문집이 전라 감사 이봉징(李鳳徵)에 의해 1692년경 원집(原集) 67권, 별집(別集) 26권의 목판본으로 ‘기언(記言)’이란 이름을 달고 간행되자, 김주신(金柱臣)은 그 제명 방식이 역사적 유래에 비추어 통례와 다르고, 고루한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문집의 명명 방식은 일반적으로 저자 이름의 대칭으로 쓰이는 호(號)에다 ‘집(集)’, ‘고(稿)’를 붙여 제명하는 것이 통례였다. 저자가 생전에 ‘만초(漫艸)’, ‘만록(漫錄)’ 등의 겸사로 자신의 문집[私稿]에 이름을 붙였더라도, 후인들이 이를 편집하여 출판할 때에는 사회적 관례에 따라 서명을 다시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주역(周易)』의 익(翼)에, “군자가 집 안에 있으면서 말이 선하면 천 리 밖에서도 호응하는데, 하물며 가까이 있는 사람이겠는가. 집 안에 있으면서 말이 선하지 않으면 천 리 밖에서도 배반할 것인데, 하물며 가까이 있는 사람이겠는가. 말은 자신에게서 나오지만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고, 행동은 가까이에서 시작하여 멀리 드러난다. 그러므로 언행은 군자의 중추이니, 이 중추의 움직임이 영예와 오욕의 관건이다. 언행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평소에 말을 하면 반드시 글로 남겨서, 날마다 반성하고 노력하면서 나의 글을 기언(記言)이라 하였다. [易翼曰。君子居其室出其言。善則千里之外應之。況其邇者乎。居其室出其言。不善則千里之外違之。況其邇者乎。言出乎身加乎民。行發乎邇。見乎遠。言行。君子之樞機。樞機之發。榮辱之主也。言行。君子之所以動天地也。可不愼乎。穆。唯是之懼焉。言則必書。日省而勉焉。名吾書曰記言。]
허목은 「기언 서(記言序)」에서 자기 삶의 지향을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자신의 문집 이름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고루하다’고 지적한 허목 문집의 명명 방식은 바로 저자 자신의 삶의 지향점을 알려 주는 지표이자, 그의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주신의 언급대로 옛 시대의 문집 명명 방식을 고집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문학적 지향점까지도 말해 주고 있다.
송시열(宋時烈)의 『우암유고(尤庵遺稿)』, 『우암선생문집(尤庵先生文集)』,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이어지는 문집 간행사는 송시열을 바라보는 후인들의 시선을 보여준다. ‘유고’에는 추념(追念)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송시열이 이단하(李端夏)가 부친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을 간행할 때 그 제명에 대해 조언하면서, ‘고(稿)’자에는 겸손의 의미가 있어 ‘집(集)’으로 바꿀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겸칭의 의미로 쓰였던 듯하다. 집(集)은 시와 문을 합쳤다는 의미로 쓰여 가치중립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유래한 ‘대전’이라는 명명은 그 명칭이 적절한 것인가 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 유래에서 짐작하듯 도통의 계승이라는 숨은 의미까지 담고 있다. ‘우암’, ‘우암선생’, ‘송자’라는 이름 역시 그의 위상이 통시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아울러 호가 의미하는 저자의 삶의 공간 혹은 지향과 결합되면서 저자가 남긴 텍스트를 읽는 문턱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우암집』을 읽는 사람과 『송자대전』을 읽는 사람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책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본문 텍스트를 막 읽기 시작하는 독자의 마음을 선취해서 그에게 어떤 태도로 읽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알려준다.
옛 책에서는 책 이름이 놓이는 위치도 표제, 권수제, 권말제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그 이름도 상이한 경우가 보인다. 한 책 안에서 달리 나타나는 서명을 서지학에서는 권수제를 대표서명으로 기준해서 목록화하는데, 그 차이 역시 옛 책 이름의 한 특징이라 할 만하다. 특히 표지에 쓰이는 서명의 경우에는 그 서명을 쓴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서 책 자체가 갖는 의미 역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책의 외부와 내부에서 위치, 시간에 따라 그 기능 등이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 책의 ‘문턱’이라 은유화된 공간에 서서 책 안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 것이다. |
글쓴이부유섭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주요 역서
- 『소문 사설, 조선의 실용지식 연구노트』(공역), 휴머니스트, 2011
- 『일암연기』(공역),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
- 『형설기문(한밤에 깨어 옛일을 쓰다)』(공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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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메일링서비스의 수신한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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